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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래범 Sep 13. 2021

퀴어리즘, 미학사의 새로운 지평

책 <퀴어리즘> 리뷰

 예술 작품을 거칠게 이분화하자면 곧바로 감각으로 '스며드는' 작품과 이성으로 '인식되는' 작품이 있다. 보통 전자를 좋은 예술이라 여기게 되는데, 그 이유에는 보편성이 자리하고 있지 않나 싶다. 우리 모두는 ―일정 부분이 결여되었을 지라도― 감각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작품이나 작가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온전히 그 자체로써 큰 감흥을 일으키는 작품은 보통 고전적인 의미의 '미'를 갖추고 있는 경우가 많다. 아름다움은 감각 사이로 빠르게 흡수되어 머리를 울린다.  


이는 곧 예술 작품 앞의 관람자가 기대하는 가장 근본적인 욕구를 충족시킨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러나 예술학도로서 나는 후자의 경우에 더욱 마음이 쓰여왔다. 그러나 이는 캔버스 너머의 세세한 진실을 알고 싶다는 지적 욕망을 넘어 집착으로 변질되고 있었다. 즉, 알아야만 눈에 보이는 작품들에만 그 예술적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오디오 안내나 도슨트의 설명 없이는 전시를 관람하기 어려워졌다. 맨몸으로 작품 앞에 서노라면 앞이 깜깜해지는 느낌이었다. 이 작품에 대한 학자들의 공신력 있는 견해와 미학사적인 틀, 캔버스 뒤의 역사를 낱낱이 아는 것에 큰 공을 들이게 된 것은 어쩌면 당연했다. 보자마자 감각으로 스며드는 작품들은 일차원적이라는 평평한 인식이 내 사유에 딱딱히 들러붙었다.  나는 예술을 기존의 틀에만 끼워 맞춰 작품 자체가 지닌 아우라를 놓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답보 상태의 나에게 이 책은 매우 시의적절하게 찾아왔다. 


<퀴어리즘>의 길지 않은 서문은 나의 이런 고집스런 감상법에 균열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자연산 활어 같은 생명력으로 찬란한 우주의 빛을 내뿜으며 내 심장에 아름다운 큐피드의 화살을 아낌없이 쏘아주었던 나의 뮤즈 미술이 어쩌다 미학 이론이라는 쇠창살에 갇히게 되었을까? 참으로 허탈했다. - <퀴어리즘> p.5

<퀴어리즘>의 저자는 미술사적인 의미는 물론 그 경제적 가치까지 상당한 주요 작가와 작품들을 선정해 연구하며 이들 중 상당 수가 공통의 '시그널'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을 종합한다. 이는 바로 퀴어로서 정체화된 작가들이 보내는 시그널이다. 그러한 그들의 정체성을 배제한 채 그저 미학적인 틀에만 구겨 넣기 급급했던 고답적인 분석 방식을 지적하는 것으로 책은 서문을 연다.  


 저자가 이미 수십 번도 더 쓰인 미학사를 완전히 새로운 관점에서 재해석할 수 있게 된 이유는 (책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론의 쇠창살 속에서 안락사만을 기다리던 '자유의 새'들을 풀어주었기 때문이다. 마이너리티로서의 퀴어들은 아주 오랜 역사 동안 주류와 비주류의 흑백 분류법에 의해 망명자의 신세를 피할 수 없었고, 주요 논의에서 배제되어 왔다. 미학사를 장식한 거장들의 상당 비율이 퀴어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 관점이 힘을 얻지 못했던 이유는 바로 그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퀴어리즘>의 집필과 출판은 그 자체만으로도 큰 의미를 지니며, 일종의 미술사적 도약이라고 생각한다. 미술을 그저 미술과 미학의 틀에만 가둬 보는 것이 아니라 사회와 인간의 관점에서 더욱 폭넓게 해석하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고대 그리스 로마의 미술을 시작으로 르네상스를 거쳐 현대미술의 출발과 정점을 관통하고 지금까지도 진행형으로 남아 있는 퀴어 미술가들의 예술적 특이점을 지금부터 '퀴어리즘'이라 명명하고자 한다.  - p.13


 퀴어와 소수자 서사에 대한 빌드 업을 충분히 쌓는 책의 서술 방식이 상당한 도움을 준다. '이제는 또 다시 논의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나' 싶을 정도로 수없이 해석되었던 걸작과 그 작가들에 대한 새로운 시각이 큰 설득력을 지니게 되는 이유이다. 


책의 서술적 특징을 간략히 소개하고 싶다. 500페이지가 조금 안 되는 꽤 두께감 있는 책이지만, 고해상도의 컬러 사진들과 '퀴어리즘'이라는 제목답게 톡톡튀는 편집 형태, 술술 읽히는 쉬운 서술 방식 등이 인상적이다. 또한 누구나 최소 이름 정도는 들어봤을 법한 유명한 거장들에 대해 말하기 때문에 여타 미술 서적들이 지닌 장벽을 상당히 낮춘다. 무엇보다 딱딱한 학문적 지식이 아닌 작가의 삶과 그 서사를 들여다보기 때문에 서사에 상당히 마음을 주는 우리로서는 끌릴 수밖에 없다.

 

 또한 읽다 보면 우리가 퀴어 정체성의 창조적 발현과 퀴어 예술가들이 이뤄 온 예술사적 업적에 대해 아주 낯설어 하지는 않음을 깨닫게 된다. 개인적으로 나의 일상에 퀴어의 존재가 얼마나 긴밀히 스며들어있는 지를 이해하고 있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퀴어의 존재가 아직은 낯선 이들에게조차도 저자 특유의 통통 튀는 유쾌한 문체는 분명 마음을 건들이는 부분이 있을 것이다. 

프라다 칼로


 가장 인상적이라 할만 한 지점은 여성 예술가들에 대한 언급이었다. 퀴어에 대한 관심은 곧 역사 상 비주류의 저울에 올라탈 수밖에 없었던 수많은 이들, 예컨대 여성, 유색인종, 아이, 난민, 특정 종교인, 사피엔스가 아닌 모든 종들에게까지 뻗어간다. 변연부에 놓일 수밖에 없는 이들은 각자의 소수자성에 깊이 공감하고 그것을 특정한 방식으로 위로하며 나아가기에 이른다. 


 책 <퀴어리즘>은 그의 한 축으로도 읽힌다. 책의 마지막 장에서 나로서는 너무나 반가운 여성 예술가, 프리다 칼로에 대해 논한다. 부제는 '절망에서 피어난 페미니즘의 꽃'으로, 그가 퀴어로서의 소수자성뿐만 아니라 페미니즘적 시각을 겸비한 여성이었다는 점을 들어 또 다른 입체성을 부여한다. 여성인 프라다가 겪은 수많은 고통과 차별 속에서 그가 결국 안착한 곳은 함께 싸워나가고 있던 동성 예술가들이었다. 바이섹슈얼이었던 프라다는 여성과 퀴어라는 커다란 두 소수자성을 안고서 이들의 손을 잡고 예술사의 새로운 획을 그어갔다. 


 이처럼 퀴어에 대한 논의가 다양한 사회적 마이너리티의 공론장으로 번져나간다는 점을 명확히 짚은 것이 이 책의 강점이다. 작가들은 걸작을 탄생시켰다는 의미에서 신화적 존재로 논의되어 왔지만, 그들을 하나의 인간으로 관조하는 시선 역시 필요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럴수록 인간으로서의 입체성이 두드러지고, 그들의 삶과 작품을 감상 및 해석할 때 다양한 관점을 취해 그들의 삶이 그저 공허한 신화로 고이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이다. 이의 초석을 위해서라도 책 <퀴어리즘>을 꼭 만나보길 바라는 바이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55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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