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애니페스트에 다녀오다
지난 9월 13일, '인디애니페스트 2021'에 방문했다.
독립영화를 만드는 영화인으로서 꾸준히 동경해온 장르가 있다면 '애니메이션'이다. 어쩌면 경외에 가까울지도 모르겠다. 기술과 예술의 결합은 꾸준한 긴장감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일 텐데, 애니메이터들의 서사적 실험은 매번 나에게 세상을 겹쳐 보는 새로운 필터를 끼워주곤 한다.
영화도 기술에 민감한 매체이지만 애니메이션은 특히나 그러하다 느낀다. 아트테크놀로지의 최전선에서 기술이 서사 텍스트에 미치는 영향을 가장 빠르게 실감하도록 하는 장르이기 때문이다. 10년 전의 애니메이션 작품을 보면서도 그 전위성에 놀라는 나인지라 이번 '인디애니페스트 2021'에 꼭 참여해 최신 애니메이션의 트렌드를 경험해보고 싶었다. 더해서 장기화되고 있는 팬더믹 상황이 애니메이터들에게는 어떻게 작용했을지 궁금증도 커졌다.
이번 제17회 인디애니페스트의 슬로건은 위와 같다. '人비트人'이라는 슬로건은 애니메이션만을 다루는 영화제의 독보적인 정체성을 살리는 것은 물론, 팬더믹 상황에 의한 단절에 애니메이션적 해답을 제시하겠다는 선언처럼도 느껴졌다. 또한 상영되는 애니메이션 작품들이 관객과 세상 사이의 교량 역할을 하기를 염원하는 마음도 담겨 있다. 이는 사견이지만 애니메이션이 현실과 환상의 사이에, 동적인 영상과 정적인 회화 사이에서 그 정체성을 공고히 해나가며 '중간' 위치를 선점하고 있다는 점도 슬로건의 독창성에 한 몫 했다 느낀다.
매 섹션 시작에 앞서 상영되는 트레일러 <인디의 별>은 이 슬로건을 완벽히 영상화한 결과이다. 애니메이션 작업을 통해 함께 연결되고 나아가 하나의 서사적 흐름, 하나의 작품으로서 결합할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준다.
'독립', '실험', '열정', '비전'은 인디애니페스트가 꾸준히 추구하는 주요 가치들이다. 상업 애니메이션 영화들이 제공하는 스펙타클에 더 익숙한 사람이라면 '독립 애니메이션'이 과연 현재의 우리에게 무엇을 제공해줄 수 있을 지 의구심을 가질 지 모른다. 이번 인디애니페스트에 방문한 나로서는 독립영화이기 때문에 담을 수 있었던 메시지와 실험적인 기법의 사용, 장편 애니메이션 등으로의 서사적 발전이 기대될 만큼의 가능성 등을 그 답으로 제시하고 싶다.
필자는 9월 13일에 CGV명동역 씨네라이브러리를 방문해 '새벽비행2'와 '독립보행4' 섹션을 관람했다. '새벽비행'은 학생 애니메이터들의 작품을 엿볼 수 있는 섹션으로, 역시나 학생 신분으로 독립 영화를 제작하고 있는 필자의 입장에서는 더욱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독립보행'은 기성 애니메이터들의 노련하면서도 실험적인 작품들로 꾸며져 있었다. 그만큼 기술적으로도, 또 서사적으로도 완성도 높은 작품들이 주를 이뤘다.
입장 전 모든 관객들에게 작은 쪽지 한 장이 주어지는데, 투표 용지였다. 해당 섹션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애니메이션을 종이 귀퉁이를 조금 찢어 표시하는 방식으로 투표하게 되어 있었다. 이러한 참여형 시스템 역시 관객과 애니메이터들 사이를 연결하는 하나의 끈처럼 느껴졌다. 정직한 투표를 위해서라도 작품에 더욱 집중해야 겠다는 다짐과 함께 관람에 임했다.
아무래도 필사로서는 학생들의 작품에 더욱 마음이 갔다. 학생이라는 신분의 한계, 팬더믹 상황의 특수성, 기술적 실험의 제한 등이 작용했을 텐데도 작품들은 모두 각자의 색으로 독창적이었다. 간혹 녹음 환경이 좋지 않아 소리가 튄다거나 성우의 연기가 다소 아쉽게 느껴지는 등의 감상도 떠올랐지만 이 모든 것이 학생 독립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가장 기억에 남은 작품을 소개하고자 한다.
김환이 감독의 'EYES'이다. 6분 정도의 비교적 짧은 러닝타임이었는데도 목탄으로 거칠게 칠한 것 같은 독보적인 그림체와 으스스할 정도로 생생한 사운드의 활용, 담아낸 메시지 모두가 인상적이었다. 작품 소개에 따르면 주인공은 사회 불안증의 일종인 '시선 공포증'에 시달리고 있다. 주인공의 기억은 학창시절, 대학 시절 등을 거슬러 가며 그의 정신 장애가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음을 보여준다.
주인공 외의 모든 사람들은 검은 실루엣으로 묘사되지만, 하얗게 뜬 커다란 두 눈만은 생생하다. 그들은 모두 주인공을 응시하고, 그의 행적을 끈질기게 쫓는다. 주인공의 시선 공포증이 극에 달하는 상황은 한순간에 쭉 늘어나는 목에 비대해진 머리가 주인공의 눈 앞을 막고 서 있는 것으로 묘사된다. 깜빡이는 눈들은 주인공의 모든 결함을 파헤치겠다는 듯 집요하게 다가온다. 시선 공포증에 대한 개념도 없었던 필자이지만 주인공의 공포심을 온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생생한 묘사였다. 주인공은 매번 그 기억의 괴로움에서 도망치는 모습을 보이지만, 도망마저도 그에게는 어떻게든 고통을 이겨내 멀쩡히 삶을 살아내려는 분투와도 같다.
작품의 마지막 부분이 정말 압권이다. 매번 시선에 시달리기만 했던 주인공이 버스 정류장에 앉은 옆 사람을 응시하는데, 순간 둘의 처지가 치환된다. 오히려 시선의 피해자가 되는 것은 정류장에 앉아 있던 남자로, 주인공은 까만 실루엣으로 변해 남자를 응시하는 가해자가 된다. 주인공의 고통에 이입하며 안타까움을 느끼던 나는 순간 등골을 훑는 섬뜩함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완벽히 타자화되던 서사가 내 안으로 들어오는 순간을 가장 생생히 느낄 수 있던 작품이었다.
우리 모두 타인의 시선이 두려웠던 기억이 있을 것이다. 응시하고 응시 당하기를 반복하는 세상에서 누군가의 시선 만큼이나 괴로운 척도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김환이 감독이 'EYES'를 통해 묘사한 시선은 날카로운 칼날 같다기 보다는 날이 덜 선 육중한 도끼 날과 유사하다. 아주 천천히, 또 무겁게 존재를 눌러오는 시선들로부터 도망칠 곳은 없을까. 모든 이들의 기억 속에 잔잔히 누워 있던 시선에 대한 고통은 어쩌면 가장 따뜻한 형태의 교류로 여겨지는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대화하는 행위에마저도 낯설게 한다.
인디애니페스트에 방문한 기억은 내게 아주 소중한 기억으로 잔여할 것이다. 세상이 온통 색과 선, 가벼이 움직이는 캐릭터들과 음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준 작품들이 가득했다. 독립 애니메이션만의 매력은 바로 거기에 내제한 것이 아닐까. 내년에 반드시 다시 찾고 싶은 영화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