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존재를 몸과 정신으로 이분해온 이래부터 몸은 언제나 정신보다 열등한 것이었다. 몸은 욕망에 굴복하는 세속적인 존재로, 정신의 숭고한 지향을 방해하는 협잡꾼이었다. 많은 종교에서도 육체적 쾌락을 멀리 하고 정신을 수양할 것을 권고한다. 그러나 몸은 정말 욕망의 하수인일 뿐일까? 부끄러워하고 억압해야만 하는 대상인가?
현대 사회를 살아가는 우리는 정신이 몸에 끼치는 영향만큼이나 파괴된 몸이 정신까지 좀먹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자본주의의 속성이 그러하다. 육체는 하나의 생산수단이며 자원이 된다. 그렇기에 자원과 마찬가지로 소비되고 고갈된다. 그 사실을 신랄하고도 아프게 드러내는 작품이 여기에 있다. 극단 코끼리만보가 선보이는 연극 <괴물B>는 산업재해를 소재로,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찢어지고 페기된 몸의 양상을 생생히 그린 작품이다.
공허한 망치 소리와 함께 조명이 서서히 밝아진다. 무대 곳곳에 서 있는 배우들은 특정 직업을 상징하는 유니폼을 입은 채 어딘가 뒤틀린 자세로 서 있다. 힘겨운 걸음들에 비명 같은 대사가 따라 붙는다. 찢어졌어, 깔렸어, 치였어, 떨어졌어... 그들의 서사를 전부 담기에는 역부족인 비명들이 그저 흩어진다.
그 원통함이 누군가에게 가닿은 것일까. 그들의 찢어지고 깔리고 치이고 떨어진 몸의 일부는 새로운 몸을 통해 하나로 피어난다. 말 그대로 자본주의 낳은 괴물, B의 탄생이다.
작품의 배경은 오래된 폐공장. 사람의 흔적이 오래 닿지 않은 것치고는 깔끔한 이곳에 '연아'가 찾아온다. 직접 이곳을 청소하고 휴식 공간으로 만든 연아는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콜에 착실히 움직이는 배달 기사이다. 그런 연아의 공간에 누군가 침입한다. 성별도 가늠하기 힘든 기이한 복장의 괴물B와 중년의 남성 한 명. 그들 사이에서는 수상한 대화가 오가고, 연아는 자신이 쉬러 올 때는 자리를 양보해주겠다는 약속을 받고 떠난다.
괴물B의 몸은 찢어지고 폐기된 '몸'들로 이뤄져 있다. 산업재해로 인해, 또는 산업재해로도 인정되지 않는 어떠한 부상들로 인해 찢긴 몸들이 콜라주처럼 기워진 괴물. 그를 정의할 수 있는 말은 그 정도이다. 괴물B는 언제나 악몽에 시달린다. 매순간 가감없이 전해져오는 몸의 주인들의 고통과 비명이 그를 놓아주지 않는다.
연아는 괴물B에게 사람을 찾아달라는 의뢰를 받는다. 그때부터 인물들의 내외적 갈등이 가속화된다. 극이 진행되면서 괴물B의 목적이 죽는 것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그러나 그가 죽을 수 있는 일한 방법은 죽이는 것뿐이다. 그가 찾는 세 사람은 B를 이룬 찢어진 몸들의 주인으로, 마지막 생존자이기도 했다. 찢어진 몸 때문에 살아있는 것이 더 고통인 이들을 죽이는 B는 그들을 원망하기 보다는 애틋하게 사랑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을 죽이고 자신 역시 죽는 것이 최선이라 믿는다.
그들이 진정으로 해방될 수 있는 방법은 무엇일까. 아니, 해방될 수 있었던 방법은 무엇이었을까. 연극을 보는 내내 곱씹게된 생각이다.
연극 <괴물B>는 시의적절한 메시지와 강렬한 소재가 어우러진 인상적인 작품이다. 괴물B라는 존재를 주축으로 자본주의 사회에서 쓰고 버리는 기계 부품 그 자체가 되어버린 '몸'들에 주목한 것은 인상적인 선택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산업재해 피해자들의 목소리를 괴물B라는 하나의 통로에 모음으로써 효과적인 극적 장치를 마련했다.
또한 '연아'가 지닌 캐릭터성도 주목할만 하다. 앞으로 많은 이들이 교묘해져만 가는 자본주의 논리의 피해자가 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것 같다. 연아는 자신이 원하는 시간에, 자신이 원하는 만큼 자유롭게 노동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플랫폼 노동의 특성 중 하나이다. 그러나 그는 시도때도 없이 울리는 콜에 집착하고, 가까운 거리가 뜨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일을 하러 간다. 연아의 고용자는 실체가 없다. 굳이 말하면 시스템이고 AI이며 서비스 그 자체이다. 매순간 노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들을 자율성이라는 미명에 가둬두고, 노동자로서 응당 보장 받아야 할 권리들은 포기하게 하는 모순이 앞으로도 끊임없이 발생할 것임을 경고하는 듯하다.
작가는 이 작품을 고안한 계기로 구의역 스크린도어 사망 사고와 태안화력발전소 노동자 사망 사건을 들었다. 그러나 하루에도 수십 번씩 발생하는 산업재해 중 주목을 받는 것은 극히 일부의 사건 뿐이고, 보여주기식 대처 이후에는 또 비슷한 사고가 발생한다. <괴물 B>는 이런 한국 노동 시장의 모순을 신랄하게 비판한다. 괴물B의 존재가 어디에 몇이나 존재하는지 알 수 없고, 다만 사라지지 않고 끝없이 생겨난다는 설정이 이를 드러낸다.
<괴물B>는 가해자에 대한 분노로만 타오르기 보다는 피해자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을 포기하지 않는 작품이다. 우리에게도 반드시 필요한 태도이다. 무엇보다 피해자들의 상처와 역사에 세심히 귀 기울이고 서사화했다는 점에서 <괴물B>를 만난 건 나에게 큰 행운이었다. 좋은 기회로 다시 해당 작품을 만날 수 있기를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