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도는 상실이 우리를 영원히 변화시킬 것이라는 사실을 받아 들일 때 시작된다. 주디스 버틀러의 말이다. 그 변화를 기꺼이 감수하는 것, 어렵고 괴롭더라도 우리는 그 지점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이것은 애도가 영원히 끝나지 않음을 암시하기도 한다. 영원한 변화를 만든 사건은, 또 그 사람은 영원히 잊히지 못한다.
끊나지 않는 애도의 조건은 살아 있는 것이다. 끈질기게 살아 남아 상실한 이들을 기억하는 것, 그들에 대해 말하는 것, 서사화하는 것만이 상실한 자의 몫이다. 장례식장에서 우리가 고인에 대한 생전 기억들을 나누는 것처럼,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이들은 증언을 통해 죽음도 지울 수 없는 단단한 실체가 되어 간다. 애도는 곧 서사화이다.
연극 <타조소년들>은 그것을 배워가는 10대 청소년들의 이야기이다. 상실이 가져오는 변화를 받아들이기 전, 변하기 이전의 세상을 붙들겠다는 외침은 청소년이기에 부릴 수 있는 객기이자 용기이기도 하다. <타조소년들>의 세 소년들은 도착한데도 영원히 당도할 수 없는 어떤 지점을 향해 쉼없이 달려간다.
재연되는 <타조소년들>, 무엇이 다른가?
동명의 영국 소설을 원작으로 하며 2016년 국립극단에서 관객들과 만났던 <타조소년들>이 올해, 대학로로 돌아왔다. 오래도록 사랑받은 이야기인 만큼, 작품의 줄거리는 여전히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 매력이 있다. 절친했던 로스가 사망하고, 남은 세 친구들(블레이크, 케니, 심)은 생전 그에게 아픔을 줬던 이들로 가득한 장례식장에서 분노와 무력감을 느낀다. 과거의 추억을 회상하던 그들은 로스와 동명인 시골 마을 '로스'의 존재를 떠올려낸다. 그렇게 로스를 로스로 데려가는 목표가 생긴 친구들. 유골함을 훔친 그들은 장장 500km를 가로지르는 여행을 시작한다.
이번 <타조소년들>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공간 활용이었다. 무대장치는 오로지 몇 개의 블록과 상자들뿐이다. 긴 여행을 다룬 작품인 만큼 공간은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곤 하는데, 연극이라는 형식의 한계 상 이것을 어떻게 표현해낼 수 있을지 궁금했다. 작품은 그 단순한 구조물들을 단지 세우고, 쌓고, 옮김으로써 가정집, 거리, 기차간, 심지어 바다까지 효과적으로 묘사해냈다. 배우들의 열연과 각종 무대효과가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하면서 제한된 공간이 오히려 풍부한 인상을 자아낸다는 느낌을 받았다.
연극의 또 다른 장점은 20대 초반 배우들을 캐스팅해 작품이 지닌 역동성을 생생히 재현했다는 점이다. 막 청소년을 지나온 배우들은 그 시절에만 지닐 수 있는 치기어림과 열정을 가감없이 표출해주었다. 물론 아직 무르익지 않은 배우들인 만큼 발성이나 발음, 감정 연기에 있어 아쉬운 부분이 존재했다. 그러나 이 서투름마저도 <타조소년들>이라는 날것의 서사가 지닌 매력으로 다가왔다.
4명뿐인 배우들은 각자 1인2역, 혹은 3역을 넘나들며 극을 더욱 풍성하게 다져주었다. 때로는 익살스럽게, 때로는 진중하게 얼굴을 바꿔가며 무대를 자유롭게 누비는 젊은 배우들을 목도하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정체성을 찾아서
'로스에게 로스를!' 세 소년이 로스의 유골함을 훔치며 외치는 말이다.
세 친구는 왜 로스를 로스로 데려가려고 했을까. 과거의 치기어림이 만들어낸 고집이자 약속일 뿐인 걸까. 필자에게는 이것이 정체성을 세워가는 과정으로 읽혔다. 로스가 있어야 할 곳은 그를 욕 보이던 선생님, 그에게 폭력을 휘두르던 동급생, 그에게 상처를 준 여자친구, 그를 외면해온 부모님 곁이 아님을 세 친구들은 안다. 그는 로스이고, 그렇기에 로스에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로스가 하지 못했던 정체성 찾기를 완수해주는 건 남은 자들, 세 친구들의 몫이다.
청소년 서사의 대부분은 성장을 다루고 있다. <타조소년들> 역시 그 구조를 따라가는데, 그들의 성장은 무리해서 성장하지 않아도 좋다는 사실을 받아들임으로써 마무리 된다. 앞만 보고 달려나간다고 성장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지나온 길들을 돌아가며 떨어진 것들을 하나하나 주워 넣으며 우리는 어른이 되어 간다고, 이 작품은 말하는 것 같다.
여행길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며, 뼈가 시릴 만큼 무서운 공간에서 잠을 청하며 그들은 세상을 넓혀간다. 로스의 정체성을 공고히 하기 위해 떠난 길이었지만 세 친구들 역시 자신의 위치를 실감하게 된다. 여행은 곧 돌아갈 곳이 있음을, 돌아가 마주해야 할 것이 있음을 확인하는 과정이 된다. 그들은 마을 로스를 향해 앞으로 나아가지만, 정작 그들의 시간은 친구 로스가 있던 과거로, 뒤로 후퇴해간다. 친구의 죽음 앞에서 그들이 해야 할 일은 오직 그뿐이다.
현실을 마주할 줄 아는 용기
여행이 진행되면서 세 친구들은 각자 감추고 있던 진실을 마주하게 된다. 블레이크는 로스 몰래 그의 여자친구와 관계를 갖고 있었고, 심은 로스가 폭력에 노출된 상황을 외면했으며, 케니는 그의 다급한 전화에 제대로 응해주지 못했다. 로스의 죽음이 사고사가 아닌 자살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던 것은 이 때문이다. 자신의 행동이 로스를 죽음의 방향으로 떠밀었을지 모른다는 가정이 사실이 되어가기 때문이다.
마침내 로스에 도착해 로스의 유골을 뿌리면서, 블레이크는 외친다. "우리는 타조 소년들이었어!"라고. 타조는 모래 속에 머리를 파묻는 습성이 있다. 겁쟁이 타조들처럼, 봐야 할 것을 보지 않았던 과거가 그들의 머릿속에 선연히 펼쳐졌을 테다. 로스의 괴로움을 목도하면서도 그저 장난과 치기어림으로 넘겼던 순간들이. 친구의 죽음을 제대로 마주 보라며 종용하는 것조차 폭력일 텐데도, 이 긴 여행 끝에 그들은 스스로 그것을 해낸다.
그러나 연극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스스로를 타조 소년으로 정의하는 순간부터 그들은 타조가 아니게 된다. 모래를 털어내고, 따가운 눈을 문질러 닦고, 그로 인해 눈물을 흘리게 되어도 좋다는 용기를 얻는다. 세 소년들은 로스의 몫까지, 타조처럼 공기를 가르며 달려나갈 것이다. 그것이 그들만의 애도 방식이다.
애도는 영원히 끝나지 않는다. 로스가 남긴 우정의 흔적이 영원히 지워지지 않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