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에도, 축하합니다-영화 <이사>

소마이 신지 <이사> 리뷰

by 래범

어릴 때의 나는 어떤 눈으로 세상을 받아들였었는지 전부 잊어버린 게 퍽 아쉬워질 때가 있다. 마냥 순진하지도 환상적이지도 않았던 기억의 편린을 안고, 나는 현재의 나를 힘겹게 통과하며 과거를 엿보는 수밖에 없다. 그건 사실 꽤 괴로운 작업이다. 그럴 때 아이가 주인공인 영화를 보면 조금은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어쨌거나 저 모든 시간을 지나서 나는 어른이 되었고, 이것에는 어떠한 거짓도 없다는 단단한 사실만이 남기 때문이다. 그리고 관객으로서는 미처 보지 못한 저 아이 역시 나만큼이나 긴 미래를 허락 받을 거라는 믿음이 굳어진다.


일본 영화계의 거장, 소마이 신지의 <이사> 역시 내게 그런 영화가 되어 주었다. 특히 주인공 렌이 부모님의 이혼을 마주하는 과정을 보며, 어린이인 자신의 의사가 전혀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인 결정들 속에서 어떻게 나와 세계를 수용하며 살아왔는지를 곱씹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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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6학년 소녀 '렌'과 어쩐지 어색해 보이는 부모님의 식사 장면으로 시작한다. 렌은 이사를 준비하는 아버지 '켄이치'에게 똑부러지는 잔소리를 늘어놓지만, 엄마 '나즈나'는 어쩐지 그 상황이 탐탁치 않아 보인다. 켄이치가 이사를 나가게 된 건 부부 사이가 나빠졌기 때문이다. 이후 렌과 엄마 '나즈나'의 동거가 시작되지만, 렌은 부모님의 이혼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 한다. 나즈나가 세운 '둘이 함께 살기 위한 규칙'을 볼 때마다 찢어버리고, 켄이치를 몰래 찾아가거나 전화를 걸며 나름대로 저항을 해보기도 한다. 그런데도 계속 저지당하거나,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하자 렌은 점점 더 과감한 선택들을 하게 된다. 집에서 나즈나를 상대로 시위를 하거나, 몰래 셋이 만나는 작전을 짜거나 하는 식으로 말이다.


그렇게 영화는 렌을 느긋하게, 그러나 집요하게 쫓는다. 소마이 신지 특유의 롱테이크 기법은 렌의 작은 표정 변화, 몸짓을 집요하게 포착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외면화된 렌의 혼란한 감정들을 발견하게 된다. 영화가 렌이나 렌의 시선에서 벗어나 오로지 어른들의 사정만을 보여주는 시퀀스는 딱 하나 있는데, 바로 렌이 집에서 시위를 벌일 때이다. 화장실에 들어가서 나오지 않는 렌 때문에 나즈나아와 켄이치, 그리고 둘의 지인인 커플이 모여 실랑이를 벌인다. 그러나 화면에서 보이지 않을 뿐, 관객은 무엇보다 벽 너머에 있는 렌의 존재만을 가득 의식하며 해당 시퀀스를 따라가게 된다. 안에 렌이 뻔히 듣고 있는 것을 알면서도 감정을 이기지 못해 서로에게 원망의 말을 쏟아붓는 나츠나와 켄이치, 그리고 그를 말리는 커플을 보며 렌이 느낀 것과 똑같은 소외감과 절망을 체험하게 되는 것이다.


싸움이 극에 달하자 렌은 안에서 소리친다. '왜 낳았어? 이럴 거면 왜 낳았어!'라고 말이다. 이후 나즈나는 렌이 있는 화장실 유리를 깨고 피투성이 팔로 렌을 잡는, 폭력적인 행동을 보인다. 부모님의 일방적인 이혼 결정으로 렌이 들 수 있는 무기는, 작은 렌이 어른들에게 낼 수 있는 상처는 겨우 그 정도였을지도 모르겠다. 이 사건 이후로 렌은 조금 작전을 변경하기로 한다. 바로 나즈나에게 비와 호수로 휴가를 가자고 하는 것이다.


영화는 후반부에 접어든다. 그렇게 둘만의 여행인 줄 알고 떠난 나즈나였지만, 그곳에는 렌이 부른 켄이치가 있었다. 켄이치는 렌을 이유로 다시 시작해보고 싶다고 하지만, 나즈나의 마음을 완전히 돌리기는 역부족이어 보인다. 렌은 자신의 모든 시도가 좌절되는 경험을 한다. 이때부터이다. 렌이 자신을 둘러싸온 익숙한 환경에서 벗어나기로 한 것은. 예전으로 돌아갈 수 없다면, 예전의 흔적이 남은 폐허에서 완전히 도망치는 편이 낫다. 그렇기에 렌은 낯선 마을을 홀로 정처없이 떠도는데, 그런 아이의 뒤로는 언제나 화려한 '마츠리'가 펼쳐지고 있다. 간혹 사람들 사이에 섞인 채 마츠리의 몇 장면을 멍하니 올려다 보기도 한다.


<이사>가 정말 '영화적'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어린 아이이더라도 가감없이 겪는 환멸, 슬픔, 공포 등의 감정의 소용돌이를 렌이 어딜 가든 배경처럼 깔려 있는 불의 축제로 표현한 것이다. 축제를 뜻하는 마츠리가 신에게 올리는 제사에서 비롯되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렌의 어떤 소망이 집약된 설정일지도 모르겠다. 혹은 수많은 이들이 각자만의 소원을 띄워 보낸 행사에 렌 역시 작은 마음을 띄워보냄으로써, 렌이 더 큰 집단과 세상의 일부로 포섭되고 있음을 보여준 지점이라 느꼈다.


렌은 앞의 마츠리 장면에서 자신을 찾으러 뛰어온 엄마 나즈나에게 소리친다. '내가 빨리 클게!' 그렇게 렌은 빨리 성장하기 위한, 자신만의 방황을 시작한다. 렌이 생각하는 '빨리 크는' 방법은 홀로 어려움을 헤쳐나가는 것이다. 그렇게 렌은 밤의 숲과 계곡을 홀로 방황하는 쪽을 택한다. 하얀 옷을 입고 자연 속을 헤집는 렌은 그러나 쓸쓸하면서도 자연스러워 보인다. 앞으로 견뎌야 할 긴 성장의 과정을, 짧게나마 압축해 몸 속에 욱여 넣어보려고 하는 자연스러운 시도 같다.


그렇게 꿈인지 환상인지 모를 멋진 장면이 펼쳐진다. 밤새 인적 드문 숲과 계곡을 헤맨 렌은 꼬질해진 채 바다에 도착한다. 그때, 렌은 멀리서 마츠리의 배가 불 타며 해안가로 들어오는 걸 본다. 그 옆에서 서로에게 물을 끼얹으며 장난을 치는 세 사람은, 다름 아닌 렌과 부모님이었다. 렌은 멀리 보이는 세 사람을 향해 뜻밖의 말을 반복한다. 바로 '축하합니다!'이다. 마치 먼 바다를 헤매다 마침내 육지에 도달한 배에게, 또 가족이라는 항해를 이어온 자신과 부모님에게 건네는 말 같다. 이제 배는 불에 타 재로 녹아내릴 것이다. 가족은 둘로, 또 언젠가 셋으로 쪼개지고 변화할 것이다. 그렇다고 바다를 건너왔던 그 꾸준한 과정이, 가족을 유지하려고 했던 그 길지 않은 시간에 의미가 퇴색되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응당 끝을 '축하받을' 노력들이 된다. 과정은 과정 자체로 남는다. 성장에 필요한 거름은 그것뿐이다.


소마이 신지의 <이사>를 4K 리마스터링 버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은 참 행운이었다. 언제 다시 극장에서 볼 수 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한 장면 한 장면을 눈에 잘 새겨두기 위해 집중했다. 개인적으로 대표작인 <태풍클럽>보다도 먼저 보면 좋지 않았을까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그만큼 소마이 신지 감독의 세계로 입문하고 싶은 이에게 자신있게 추천할 수 있는 작품이니, 꼭 관람을 권한다.


원문: https://www.artinsight.co.kr/news/view.php?no=76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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