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슷한 생각
공주와 저녁 산책을 나서면 우리는 꼭 가위바위보를 한다 별 의미 없는 놀이 같지만 이상하게도 그 시간이 참 좋다.
길을 걸으며 아무 말 없이 손을 내밀고 동시에 "가위, 바위, 보!"를 외치면 어김없이 같은 걸 낸다 가위엔 가위, 바위엔 바위, 보엔 보 희한하게도 우리는 자꾸만 비긴다 아이는 그게 마음에 들지 않는 눈치다.
"아빠는 왜 자꾸 나랑 같은 것만 내?"
투정 부리듯 말하지만 나는 그 상황이 참 행복하다 아이는 단순히 이기고 싶어 하는 거겠지만 나는 그 비김 속에서 무언가 특별한 연결을 느낀다 우리가 너무 가까이 지내서 그런 걸까? 아니면 아이가 아빠의 마음을 읽는 걸까? 그도 아니면 나도 모르게 아이의 눈빛을 따라가며 같은 타이밍에 같은 감정을 담아 손을 뻗는 걸까?
사람들은 눈빛만 봐도 마음을 안다고 쉽게 말하지만 살다 보면 그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게 된다 말하지 않아도 통한다는 건 사실 굉장한 축복이고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그런데 내 아이와는 그게 된다 놀라운 일이지만 정말 그렇게 느껴진다.
‘눈치가 빠르다’는 말과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건 다르다 눈치란 상대의 움직임을 빠르게 읽고 내가 그에 맞춰 움직여야 하는 능력이다 어쩌면 내가 원하는 방향과 다르게 움직이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비슷한 생각을 한다’는 건 다르다 그건 마치 마음의 중심이 같은 자리에 닿아 있는 느낌이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 암묵적으로 동의하는 순간 그 조용한 연결이 우리 가족이 지금껏 버텨온 비밀스러운 끈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우리는 혼자가 아니다 가끔은 무너질 듯 힘들고 가끔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이 지칠 때도 있지만 그럴 때마다 아이의 손을 잡고 산책을 나서면 어느새 마음이 조금씩 풀어진다 혼자서는 버티기 힘든 날들도 아이의 웃음소리와 사소한 장난 속에서 살아갈 힘을 다시 찾게 된다.
"초등학교 3학년 짜리가 뭐가 그렇게 대단하냐"
고 묻는다면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나에겐 등대 같은 존재라고 거센 파도에 휘청거리는 삶의 배 안에서
앞이 보이지 않는 밤에도 멀리서 빛을 비춰주는 그 아이 덕분에 나는 방향을 잃지 않고 다시 노를 젓는다.
작은 손을 꼭 잡고, 동네 골목을 한 바퀴 돈다 오늘도 낮에는 햇살이 무겁게 내리쬐더니 밤이 되니 바람이 선선하다.
참 묘한 5월이다 뭔가 다 끝난 것 같으면서도 또 새로운 계절이 시작될 것 같은 기분.
시간은 너무 빠르게 흘러간다 아이의 손이 어느새 이렇게 컸다 언젠가 이 손이 내 손을 놓고 자신의 길을 걷게 될 날이 올 테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이 손을 놓고 싶지 않다.
좀 더 흔들리지 않는 어른이 되고 싶다 아이가 기댈 수 있는 바위 같은 사람이 되고 싶다 하지만 그렇게 단단한 존재가 된다는 건 생각보다 어렵다 나는 아직 40 먹은 이 나이에도 종종 흔들리고 갈피를 잡지 못할 때가 많다.
그래도 오늘처럼 아이와 나란히 걷는 이 길 위에서 우리는 비기는 법을 배운다 이기는 것도 지는 것도 중요한 게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