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리 없는 숙제 전쟁
아이의 하원(센터에서 끝나는 것도 하원이라고 해야 할까 하교라고 해야 할까?)과 나의 퇴근이 끝이 나면 어김없이 시작되는 전쟁이 있다 이름하여 숙제 전쟁
“아빠, 나 오늘 진짜 피곤한데. 숙제는 놀다가 하면 안 돼요?”
이 말이 처음 나왔을 땐 그저 웃었다 두 번째는 설득을 해봤고 세 번째부터는 나도 전략을 짜야했다
“그럼 이렇게 하자. 지금 30분만 하고, 나머지는 30분 놀고 해도 돼.”
“진짜?”
“네가 약속 지키면 말이지.”
아이의 눈이 반짝인다. 그리고는 씩 웃으며 책상에 앉아 숙제를 하기 시작한다 작은 평화 협정이 성사된 순간이다
아이와 함께 사는 일상은, 누가 보면 단조롭고 평범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학교 보내고, 밥 먹이고, 씻기고, 재우는 반복의 연속 그 안에서 나는 매일 작지만 진지한 협상을 한다
양치 먼저 할지 옷을 먼저 갈아입을지 10분만 더 놀 수 있을지 이 작은 줄다리기 속에서 아이와 나는 서로의 마음을 조금씩 알아간다
하루 중 가장 긴장이 흐르는 시간이 있다면, 그건 아이가 뭔가를 하기 싫다고 말하는 순간이다 나도 하루 종일 일하고 지쳐 있지만 아이의 표정을 보면 쉽게 화를 낼 수가 없다
그 표정엔 하루를 버텨낸 초등학교 3학년의 피로가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 가끔은 지는 척하면서도 아이의 리듬에 맞춰본다 딱 30분만 하자고 타협하고, 그래도 책상 앞에 앉은 모습이 기특해서 뒤에서 몰래 미소를 짓는다 문제를 풀다가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나는 살짝 고개를 내민다
“어이구, 딴생각하네?”
“아니에요! 방금 한 문제 풀었어요”
말은 그렇게 해도 눈동자는 어느새 책상 위의 핸드폰이나 아이패드로 향해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괜히 한숨을 쉬는 척한다.
“다 하고 자야지, 몇 시까지 숙제하다 자려고 그러실까?”
그러면 아이는 꼭 이런다
“아빠도 일 미뤄본 적 없어?”
나는 고개를 끄덕인다
“자랑은 아니지만 아빤 하겠다고 하면 다 했어 ㅋ.”
조금만 더 크면 아빠는 말을 재수 없게 해라고 하려나?
얼마 전엔 아이가 내게 이렇게 말했다
“아빠는 왜 항상 나한테 지는 것 같아?”
순간 웃음이 나왔지만 곧 진지하게 말했다
“아빠가 진짜 공주한테 지는 때는, 네가 아무 말도 안 하고 방문 닫고 들어갈 때야.”
그 말을 듣던 아이는 조용히 내 무릎에 올라와 앉았다 따뜻한 체온이 전해졌다 그 순간 나는 확신했다 우리가 매일 나누는 이 말다툼과 협정들이 사실은 서로에 대한 애정의 방식이라는 걸
요즘 들어 아이는 문제를 풀다가 나를 불러 해답을 확인받고 틀리면 어깨를 축 늘어뜨린다 그럴 땐 꼭 말해준다
“틀려도 괜찮아. 틀려야 배우는 거니까.”
사실 그 말은 나에게도 하는 말이다 아이를 키우는 일도 나 자신을 돌보는 일도 늘 정답은 없고 계속 틀려가며 배우는 거니까
오늘도 우리는 숙제를 앞두고 협상을 시작한다 내일 아침에 해도 되느냐 문제 하나만 더 풀고 놀 수 있느냐 결국엔 같이 책상에 앉아 머리를 맞대고 나란히 문제를 푼다
이 전쟁은 어쩌면 평화롭다 우리가 함께 살아가고 있다는 증거니까 그리고 오늘 밤도 평화 협정은 무사히 체결되었다
그래 그거면 되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