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해하는 분이 있으실까 봐 시작에 앞서서 누가 더 낫다고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는 점 분명히 하고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나는 어렸을 때부터 계획적인걸 좋아했다. 사고 싶은 게 있으면 다달이 얼마를 모아야 하는지 계산했고 너무나 가지고 싶으면 용돈을 아껴서라도 구입했고. 목표가 생기면 그 목표를 이루기 위해 진짜 진짜 최선을 다했었다. 플랜맨 수준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생각보다 강박적으로 계획을 지키는 편이었던 거 같다. 이런 성격의 단점이라면 나만의 계획이 완성되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부분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이고 그러다 보니 생긴 단점이 목표치를 자꾸 내 한계점보다는 할 수 있는 부분까지 타협하게 된 거라고 볼 수 있다
반면에 와이프는 되는대로 살았다, 가지고 싶은 게 있어도 지금 여력이 없으면 그냥 포기했다, 아픈 것보다 병원 가는 게 귀찮다면 참다가 일을 크게 만들었다. 일은 하다가 힘들면 참고 더 해보자는 게 아니라 관뒀다 장점이라고 말하면 목표에 대한 집중도가 없으니 삶에 스트레스가 적었다는 것이고(스트레스받으면 관두면 되거든) 단점은 목표를 이뤄본 게 별로 없으니 자기의 능력을 객관화를 잘 못 시키는 게 좀 문제였던 거 같다 옆에서 보고 있으면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도 뭔가에 막히면 쉽게 놓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가족이라는 건 분명 힘들어도 서로를 위해 좀 더 노력하는 거라고 배운 것 같은데 나는 와이프의 행동이 종종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이번 달 가스비랑 전기세가 너무 많이 나왔는데."
카드 결제 내역을 살펴보며 가계부를 살펴본다. 대학교 졸업하고 나서부터 계획적으로 살기 위해 쓰기 시작한 가계부이다, 이사 온 집이 평수가 넓어져서 인지, 가스비가 한 30프로 정도는 올라갔다. 전기세는 비슷 한 편인데 새로 산 세탁기, 건조기가 전기세를 조금 더 올려 논 것 같기는 하다, 와이프는 내가 가계부 쓰는 걸 매우 신기해했다. 나도 처음부터 가계부를 쓴 건 아니었는데, 돈을 벌기 시작하니까 쓰게 되더라,
우리 부부는 각자 돈 관리를 했다, 맞벌이한다고 했던 와이프는 앞서 말했던 것처럼 맞벌이를 꾸준하게 하진 못했다. 내가 메인으로 버니까 본인이 하다가 힘들면 금방 관두곤 했다 그런 게 맘에 쓰여서 저축하게 일부를 주라고 해서 저축하고 나머지는 쓰라고 했었는데 그것도 몇 번 들쭉날쭉 주거나 안 주거나 했다
부부 싸움의 대부분은 돈 때문에 일어났다 내 벌이가 넉넉지 않으니 돈이 잘 모이지 않았다 아마 대부분의 부부들이 겪는 어려움 이기도 할 것 같다 돈이 부족하니 맞벌이하는 게 어떻겠냐고 이야기하게 되고, 하려고 해도 잘 안되면 싸우고, 싸우면 풀기 힘들어지고, 이게 계속 악순환이 된 거 같다. 아이 케어하는 게 본인 일하는데 힘이 들까 봐 4년 전쯤 첫 가출 때부터는 내가 출퇴근하면서 아이를 등 하원 시키고 집에 데려왔었는데 그럼에도 일 하는 날 보다 집에 있는 날이 더 많았다(이럴 거면 그냥 아이를 아내에게 맡길걸 그랬나 싶기도 하다)
19년도까지는 종이 가계부 20년도부터는 엑셀 가계부를 만들어 썼다
"아빠 뭐해요?"
"아빠 가계부 써요, 이번 달에 얼마 썼는지 봐야 나중에 우리 딸 옷도 사주고, 장난감도 사주고, 맛있는 거도 사주지?"
"헤헤 아빠 사랑해요."
뭐 사준다는 말에 뒤로 다가와 목을 꽉 끌어안아준다, 나는 그게 또 좋아서 볼에 뽀뽀를 해준다. 작년 겨울쯤에 회사 사정이 안 좋아져서 실직을 했다. 그래도 오래 다닌 회사라 실업급여가 생각보다 오랫동안 나오길래 한식조리사 자격증을 땄다. 아내는 웬일로 오랫동안 일을 다녔다 5개월 정도 되었지만. 그동안 한두 달 다니고 관뒀던 걸 생각하면 장족의 발전이다 다만 별거 중이라는 게 문제지, 실업급여로는 풍족하게 보내기는 힘들고 딱 버틸 만큼 들어온다. 와이프가 옆에 있었다면 그래도 좀 힘이 되었을 텐데
핸드폰을 본다 엊그제 집에 돌아와서 이야기 좀 하자고 보낸 카톡이 1이 사라지지 않은 채 그대로 있다. 대화 좀 하자고 회사로 찾아갈까 생각했지만 찾아갔다가 장모님한테 전화가 와서 욕을 들었던 게 생각이나 그만 두기로 한다
"공주님 이리 와보세요 한번 안아보게."
가계부 쓰던걸 마무리하고 딸을 불러서 한번 꽉 안아준다. 어느새 이렇게 큰 건지 팔뚝 만한 때가 엊그제 같은데 이제 잘 뛰어다니고, 잘 말하고, 잘 먹고, 잘 자고, 내가 엄마 이야기하는 걸 싫어해서인지 딸은 내 앞에서 엄마 이야기를 잘 꺼내지 않는다, 그게 가슴이 참 아프다 사실 아이에게는 아빠도 엄마도 가장 소중한 사람 아니겠는가 예전에 인터넷에서 본 글이 떠올랐다 아이에게 부부싸움은 전쟁만큼의 스트레스를 준다고 그랬는데 우리가 싸울 때마다 아이는 얼마나 힘들었을까?
"아빠 숨 막혀요!"
"아아 미안해요 그래도 어떻게 해요 공주님이 너무 좋은걸."
너무 꽉 안아서 숨 막히다는 딸을 바닥에 눕히고 간지럽힌다 딸의 웃음소리가 거실을 가득 매운다, 이 웃음소리가 거실에 퍼지는 동안만은 행복한 기운이 넘실넘실 흘러넘친다 그냥 아무렇지도 않은 듯 딸에게 물어본다
"딸 엄마 안 보고 싶어요?"
"...... 잘 모르겠어요."
예 아니요 도 아닌 잘 모르겠다는 말이 가슴을 아프게 한다 하지만 나는 그 대답을 안다, 종종 할아버지 할머니 집에 놀러 가는 딸은 가끔 놀다가도 엄마가 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한다고 했다. 아빠가 자기 많이 사랑하는 거 알지만 아빠랑 엄마랑 같이 살고 싶다고 했단다 술 한잔 마시며 덤덤하게 이야기 꺼내시는 아버지의 그 이야기에 눈물을 펑펑 쏟아내고서 또 와이프에게 만나서 이야기 좀 하자고 아이는 안 보고 싶냐고 아이가 무슨 잘못이냐고 내가 뭘 잘못했냐고 알려주라고 그렇게 메시지를 보냈어도 답장이 없었다
"아빠는 우리 딸이 세상에서 제일 행복했으면 좋겠어요."
"지금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데요?"
"그거보다 더 많이 더더더더더더 많이."
딸이 손을 크게 동그랗게 만들며 말한다
"이~~~~ 만큼?"
"응 그만큼."
갑자기 울컥 거리며 눈물이 찔끔 나서 고개를 획 돌리고 눈물을 닦아냈다 딸이 내 다리 위에 앉아서 기댄다 나는 천천히 조막만 한 머리를 쓰다 듬어준다
시간은 금세 흘러 버린다 아이 밥을 먹이고, 간식 먹이고, 설거지하면서 숙제하는 거 봐주고, 이 닦이고, 청소기 간단하게 돌리고, 아이 눕히고 동화책 읽어주고 아홉 시 반쯤 재우고 나면 집안에 적막이 쌓이기 시작한다 그때부터는 내 안에 있는 우울한 감정들이 솟구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감정은 주채하기 힘들 정도로 크게 부풀어 버리며, 자꾸 안 좋은 생각들을 하게 한다 나는 그 감정의 폭풍 속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
'왜 이렇게 된 걸까'
'내 잘못인가'
'그때 그러지 않았다면 이런 상황은 없었을까?'
'차라리 외도나 도박이나 그렇게 확실한 거였으면 마음이 덜 아팠을까?'
'얼마나 지나야 이 감정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이혼 서류를 내고 확정을 받으면 그때는 자유로워질까?'
'와이프가 다시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아이와 나와 이렇게 셋이 살면 벗어날 수 있는 걸까?'
우울증 상담을 두 달째 받았다 한 달에 한 번씩 총 두 번을 나갔다, 두 번째 상담에서 선생님이 미운 사람이 있으면 그 사람 욕을 소리 내서 해보라고 했다. 나는 그 사람이 여기 없는데 어떻게 하냐고 그랬다, 선생님은 그래도 그렇게 내뱉어내야 나쁜 감정들이 빠져나가면서 마음이 편해진다고 했지만 나는 차마 하지 못했다, 모르는 사람 앞에서 하는 아내 욕이 결국은 나한테 하는 욕 같아서
결혼은 해봤지만 이혼은 해본 적이 없기에 답을 알 수 없는 고민은 풀 수 조차 없게 점점 더 단단해져 간다 밤이 유난히도 길다 오늘은 피곤한데도 잠들 수 없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