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이랑 같이 어디를 가면 종종 듣는 말 중 하나이다. 엘리베이터에서 동내 어르신들을 만나면 항상 안녕하세요 인사를 시키는데 딸아이가 인사를 하면 딸과 나를 번갈아 보시며 물어보신다 그냥 하시는 말인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아지는 건 어쩔 수가 없나 보다
"아빠여?"
"네 아빠예요.ㅋㅋㅋ"
"아이고 아빠가 왜 이렇게 젊어?"
"일찍 결혼해서 그런가 봐요."
마스크 때문이란 말은 죽어도 못하고 그냥 일찍 결혼한 핑계를 대본다. 아이 머리를 쓰다듬어 주시고는 아빠 말 잘 듣고 이쁘게 커라? 하시며 쿨하게 자리를 뜨신다
싱글대디로 산지는 2개월이 좀 넘었다. 엄연히 따지면 협의와 소송 사이에서 별거 중이긴 하지만, 대화를 해서 풀어보기에는 시간이 너무 흘러버린 거 같다. 가끔 가슴이 먹먹해지고 왜 이렇게 된 걸까 깊은 생각을 해보지만, 지나가 버린 희미한 기억 속에 가해자와 피해자의 구분이 모호해진다 그냥 나 자신을 위해서 아이 두고 나간 사람이 잘못이지 라는 생각을 해본다
아내의 가출은 사실 이번이 두 번째이다 4년 전 추석때쯤 한번, 한 달 정도 나갔다가 들어왔고, 이번이 두 번째 이혼한다고 나가서 2달을 넘게 들어오지 않는다. 대화를 하려고 문자, 카톡, 전화 모든 수단을 동원했지만 연락은 본인이 하고 싶을 때만 한다 돈이 없다더니 집을 나가자마자 차를 사셨는지 집에서 끌고 다니던 15년식 경차의 주유 카드가 정지되었다고 연락이 왔다
"하아... 대단한 여자야 정말."
"아빠 무슨 일 있어요?"
"아니야 딸은 신경 쓸 거 없어요 아빠가 일이 있어서 그래요."
"아빠 힘들면 말해요 내가 집에서 어깨 주물러 줄게요."
"그래 고마워요."
결혼생활 7년 차에 접어들고 있었는데 그동안 둘이 모은 돈이 2천만 원도 채 되지 않았다. 맞벌이를 한다던 아내는 결혼 전부터 일을 잘 못하고 금세 그만두곤 했는데 내 월급으론 딱 우리 가족 생활비와 한 달에 15만 원에서 30만 원 저축이 한계였다. 아내가 정말 가끔 일해서 벌어 온 돈은 일부는 저금하고 나머지는 본인이 다 사용했다. 나는 어떻게 그 돈이 사용되었는지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다. 그냥 가끔 다툴 때면 와이프는 니들한테 다 썼다고 그런 식으로 이야기했었다
아파트 이사를 작년 11월에 왔는데, 모은 돈이 몇 푼 안되니 있던 집을 팔고, 전세대출을 조금 받아 왔다. 신혼부부 전세대출이 올해까지 이기도 했고 아이가 내년부터는 학교를 다녀야 하고, 전에 살던 집보다 큰 집을 구해야 했는데 이 방법이 베스트라고 생각했다 내년에는 어차피 신혼부부 대출을 받을 수도 없고 일반대출보단 신혼부부 대출이 이자가 더 싸니까 그리고 처음에 우리가 계획했던 건 아이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까지 좀 큰집으로 이사 가는 거였으니까, 나는 이게 베스트라고 생각했었는데 와이프는 그게 아니었나 보다, 분수에 맞게 살아야지 대출까지 받으면서 와야 했냐고, 결국은 또 그 이야기에 서로 감정 상해서 네가 맞벌이해줬으면 사서 왔겠다로 응수하고 또 대판 싸웠지
속으로 생각을 하다 보니 집 근처 마트에 도착했다 매주 화요일은 구매금액 7% 즉시 행사해주는 날이라 이 날만 장을 본다, 미리 살걸 적어둔 종이쪽지를 들고 카트를 민다. 딸이 도와준다며 카트를 같이 밀어준다. 요즘은 밀키트 식품들이 잘돼 있지만, 그래도 한식조리사 자격증도 땄는데 뭐라도 해먹이고 싶었다 그나마 잘하는 요리는 두부조림, 어묵볶음, 주물럭, 김치찌개, 된장국, 미역국, 스파게티, 뭐 기타 등등하다 보니까 늘긴 하더라 영상도 찍어뒀다 변호사가 하는 말이 혼자 일했는데 집안일도 했다는 게 인정이 되면 기여도가 늘어나서 재산 분할에 영향이 간다는 이야기도 했다. 아내가 아이를 놔두고 집을 나간 것도 혹여 소송이 들어가도 불리하게 작용된다고 했는데, 사실 그 당시에는 무슨 이야기 인가 싶었지,
22년도에 한식자격증을 땄다
'우리가 이혼한다고? 왜? 치고받은 거도 아니고, 장모님이랑 싸운 거고 장모님이 나한테 막말해서 싸운 거잖아 자기가 중간에서 중재해준 거도 아니고 장모가 나한테 욕하는 동안 자기는 다 듣고만 있어놓고 내가 대드니까 이혼한다 그래?'
옛날이야기까지 꺼내면 한도 끝도 없어지는 스토리이지만 잠깐 아픈 머리를 꾹 눌러본다 생각하면 할수록 스트레스만 쌓여간다.
"아빠 과자 골라도 돼요?"
"응 두 개만 골라와요 지난번에 산거 아직 다 안 먹었잖아요, 아빠는 요구르트 가져올게요."
"네~."
아이는 과자 코너로 가고 나는 음료코너로 몸을 돌린다, 가족인듯한 카트와 살짝 부딪힌다. 아빠로 보이는 사람이 미안하다고 사과를 한다, 나는 괜찮다고 하면서 옆쪽으로 살짝 비켜주자 아내인듯한 여자가 남편 허리를 자기 쪽으로 당기면서 길을 넓힌다 그리고는 뭐가 그리 좋은지 웃는다
그 모습이 꼭 옛날에 우리 모습 같아 보이기도 해서 씁쓸하다 사실 지금도 종종 젊은 시절의 아내가 꿈에 나온다 꿈속에서도 지금 우리 사이처럼 냉랭하긴 하지만 그래도 봐서 좋다는 생각이 든다, 친구 하나는 그게 미련이라고 그랬다 어찌 되었든 사이가 그렇게 틀어졌음에도 과거의 모습에 사로 잡혀 현실 파악을 못하는 거라고 그래도 어쩌냐 한 때는 내가 제일 사랑했던 사람이고 지금은 서로 멀어지긴 했지만 딸아이의 엄마이기도 한데 결국 내 배우자 욕하는 게 내 얼굴에 침 뱉는 거라는 생각을 했다 아직 남은 아니지만 남이 되기 전까지는 대화를 좀 꾸준히 해보고 싶었다 잘 안되고 있긴 하지만
"아빠 다 골랐어요."
"감자과자는 집에 아직도 남아있는데 그거 먹고 사지 또 먹고 싶어요?"
"네!"
엄마랑 식성이 많이 비슷하다 과자 먹는 취향도, 밥 먹을 때 취향도, 씨 도둑질은 못한다더니 어찌 보면 참 신기하기도 하다. 과자들을 카트에 담고 다른 코너로 천천히 이동을 한다. 아이가 뭔가를 발견한 듯 손가락을 든다.
"앗 아빠 유치원 친구예요."
딸이 가리키는 곳에 남자아이 둘이 서있고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도 서있다 아마도 유치원 친구들인가 보다 어머니 인듯한 사람과 눈이 마주치자 서로 어색하게 인사를 하고 아이들은 아이들끼리 신이 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한다
"아버님이 장 보시나 봐요??"
"아 네 장 보는 거야 뭐 어렵지 않잖아요 살 거 적어둔 데로만 사 오면 되는걸요."
"어휴 저희 남편은 손하나 까닥 안 한다니까요."
"하하 뭐 이런 집도 있고 저런 집도 있지 않나요 그래도 사랑하시죠?"
기생충의 대사에 빚대어 농담처럼 이야기하자 어머니가 풋 하고 웃더니 대답한다
"웬수가 따로 없어요."
그래도 그 모습이 왠지 정겨워 보인다 이제 우리는 그런 말도 행동도 하지 못하니까. 먼저 가보겠다는 어머니를 보내고 나는 가만히 뒷모습을 본다. 물건을 드느라 손이 부족한 엄마의 나머지 한 손을 차지하려는 두 형제의 싸움을 보며 피식 웃음이 나온다. 계산을 마치고 딸의 손을 잡고 마트에서 빠져나온다 한 손에는 물건을 다른 한 손에는 아이 손을 잡는다 나는 이제 부족한 손이 없다고 위안을 삼아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