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의 일과는 회사 건물을 바라보며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시작됐다.
회색 빌딩들 사이에서, 회사는 금빛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 금빛은 창업자가 좋아하던 색이었다. 창업자는 업계 1위 회사에 다녔었고, 그 회사가 있던 금빛 빌딩에 새로운 회사를 차렸다. 창업자는 회사를 떠났지만, 회사는 여전히 금빛 빌딩에 있었다. 마치 창업자가 떠난 후에도 회사가 창업자의 운전기사 비용까지 지불하고 있었던 것처럼.
금빛 빌딩의 한 모퉁이를 차지한 회사의 사정은 점차 어려워졌다. 퇴사자가 속출했고, 경영진은 별도의 퇴직금을 적립하지 않았던 터라 회사 재정은 더욱 악화됐다.
당시 회사는 Firm-in-Firm 형태로 운영됐다. 서너 명의 사장이 회사 브랜드를 같이 쓰고 공동 비용을 나눠내면서, 각자의 인력을 데리고 사업을 하는 구조였다.
사장들이 일감을 수주해오지 못하는 나날이 지속되며, 어느 사업부 할 것 없이 월급이 밀렸다. 옆 사업부 소속 직원들은 무급휴가를 갔다. 다른 사업부를 운영하던 사장은 위장폐업을 했다. 사장이 직원들에게 폐업을 선언하며 대다수의 인력을 정리한 후, 소수의 기존 인력과 몰래 새로운 사업부를 론칭했다.
우리 사업부도 무급휴가를 피할 수 없었다. 입사한 지 1년여 만이었다. 몇 달간의 월급은 물론, 한 달 치 월급을 훌쩍 넘는 경비도 밀려있었다. 나와 동료들은 밀린 급여와 경비를 지급하지 않으면 무급휴가를 가지 않겠다고 말했다. 무급휴가에 가있는 동안 위장폐업, 또는 진짜 폐업을 하고 돈을 떼어먹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몇 달간 밀린 월급과 경비는 무급휴가를 가지 못하겠다고 말한 다음날 바로 입금됐다.
휴가를 간 지 일주일 후, 이사에게 전화가 왔다. 급한 제안 건이 있으니, 내일부터 나와서 일하라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다른 동료들과는 다르게 복직을 시켜준다고 말했다. 나는 다음 날 일정을 핑계로 거절했다. 그 회사로 돌아갈 마음은 없었다.
잠시 후 사장에게 전화가 왔다. 사장은 다른 동료들의 단점을 하나하나 설명해가며, 앞으로 다른 동료들이 아닌 나와 계속 가고 싶다 말했다. 내게만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그리고는, 내일 나와서 일을 한다면 복직을 하게 될 확률이 높다고 말했다.
복직은 불러내어 일을 시키려는 미끼였을 뿐, 확정된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동료들에게 ‘이런 연락이 왔으니, 혹시 나가서 일을 하게 되면 복직 여부를 잘 확인하라’고 일러주었다. 동료 중 몇 명은 복직에 대한 확답을 받고 회사로 되돌아갔다. 하지만 제안 작업이 끝난 일주일 후 회사는 그들에게 다시 무급휴가를 선고했다.
그 무렵 나의 무급휴가 소식을 들었을 회사의 옛 경영진에게서 당장 만나자는 연락이 왔다. 그는 몇 년 전 회사를 떠나 개인사업을 한다고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의 이야기는 본인의 화려한 이력을 늘어놓는 것으로부터 시작했다. 그는 국내 최고 명문대를 졸업했고, 이 업계에서는 글로벌 1위 업체 출신이었다. 그는 미국 변호사이자 회계사였다. 그는 실체 없는 법인을 하나 운영하고 있었다.
그는 이직 제안을 했다. 1년짜리 계약직이지만, 1년 중 실제 일을 한 기간에만 월급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일은 언제 따와서 언제 시작하는지, 얼마나 오래 할지 알 수 없었다.
그가 내게 정규직 자리를 제안할 수 없는 이유는, 그의 실체 없는 회사가 현재 하는 일은 아무것도 없었고, 미래에도 영업을 따올 수 있을지 확실치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난색을 표하는 내게, 그는 ‘나의 실력’을 핑계 삼았다. 나의 경력이 짧고, 실력이 검증되지 않았기 때문에 정규직 채용이 어렵다 했다. 1년간 같이 일을 해보고, 내가 잘한다고 생각되면, ‘계약 연장’이나 ‘정규직 전환’을 해줄 수 있다 했다.
그의 제안을 거절하자, 그는 돌변하여 화를 내기 시작했다. 그날 들었던 말 중, 아직까지도 기억에 남는 말이 있다. 우리 업종은 맹수처럼 성장해야 하는 업종이다. 어떤 극한 환경도, 불확실성도, 리스크도 감수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호랑이처럼 클 수 있다. 그게 아니라면 이 업계를 떠나야 한다. 떠난 후에는 풀이나 뜯어먹으면서 살게 될 거고, 풀이 맛없다고 불평하면 안 된다.
얼마 후, 다시 소일거리가 생기면서 다른 동료들은 회사로 돌아갔다. 나는 무급휴가를 연장하고 이직 자리를 알아보고 다녔다.
얼마 후 사장에게 또다시 연락이 왔다. 글로벌 회사로 가고 싶지 않냐며 운을 띄었다. 본인이 다른 회사로 옮기려 하니 함께 가자는 것이었다. 그의 밑으로 되돌아간 동료들보다는 내게 적합한 자리라고 했다. 소문이 나면 안 되니 비밀로 해달라 당부했다. 최근에 다른 사업부를 운영하는 동업 관계의 사장들과 새롭게 지분관계를 정립하고 새 출발 해서, 자신이 다른 자리를 알아보는 게 알려지면 곤란해질 거라고 말했다.
드디어 나는 새 직장을 구했고, 퇴사 절차를 밟기 위해 회사를 찾았다. 마지막 면담에서 사장은 노골적으로 빈정거렸다. 업계 상황이 전반적으로 안 좋은데 용케 잘 찾아 들어갔다는 둥, 이 바닥에서 옮겨봤자 거기서 거기라는 둥, 네가 옮겨봐야 얼마나 잘 되겠냐는 둥이었다. 지난번 함께 다른 회사로 가자고 할 때와는 정반대의 모습이었다. 그가 살짝 걸쳐놓았던 Plan B가 나로 인해 틀어졌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그의 Plan B를 위해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를 비롯한 회사 경영진의 영업 부진으로 회사는 문을 닫을 위기에 처했다. 그래서 나는 무급휴가에 가게 됐고, 그래서 다른 직장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이직을 한다는 이유로 나는 죄인이 되었다.
새벽 수영을 마치고, 회사 근처로 오면 벌써 녹초가 되곤 했다.
커피를 마시며 금빛 빌딩을 하염없이 바라본다. 아침햇살을 받아 그것은 신세계 인양 찬란하게 빛났다.
하지만 그것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그것의 진짜 색깔이 보이는듯했다. 언뜻 화려해 보이는 그 빌딩은, 한편으로는 매쾌하고 침울한 색을 내뿜고 있었다. 구름이라도 낀 날이면 그것은 한층 더 쾌쾌해졌다.
그것은 금빛 빌딩의 모퉁이에 있는 회사처럼, 잠깐으로는 알 수 없는 것이었다. 그것은 뚫어지게 응시할 때만 볼 수 있는 아주 비릿한 색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