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났던 그 남자들, 과연 진짜 유죄였을까?
보는 사람의 마음마저 핑크빛으로 만들어버리는 유죄인간은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의 필수 흥행 공식이 됐다. 내가 만났던 그 남자들, 과연 진짜 유죄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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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넌 항상 날 옳은 곳으로, 좋은 곳으로 이끌어. 사랑, 사랑이야. 난 널 사랑하고 있어, 나희도. 무지개는 필요 없어.”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 속 남주혁의 고백 이후, 다음 방송이 시작할 때까지 하루가 아주 떠들썩했다. 이토록 담백하고 저돌적인 고백이라니. 그날부터 남주혁은 ‘국민 유죄인간’이 됐다. 어떤 극악무도한 죄를 지었는가 하니 보는 사람의 마음을 훔친 죄, 드라마 속 ‘남의 연애’에 과몰입하게 한 죄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유죄인간’이라 부르기로 했다.
최근 한 차례 드라마 신을 휘젓고 간 로맨틱 코미디 드라마들 덕에 죽었던 세포도 깨우는 유죄인간이 대거 탄생했다. <스물다섯 스물하나>에선 남주혁의 대사가, <사내맞선>에선 안효섭이 보여준 올곧고 순수한 진심이 유죄 포인트였다. <기상청 사람들: 사내연애 잔혹사 편>의 송강은 훈훈한 얼굴과 태평양 같은 어깨, 우월한 피지컬 그 자체로 유죄인간 타이틀을 얻었다. 일주일 내내 유죄인간들을 따라 채널을 돌리다가 ‘현실에서 이런 남자 만나본 적 있나’ 하는 묘한 현타에 사로잡혔다.
원래 사랑에 빠지면 모든 게 나를 위한 것 같고, 상대의 말 한마디에 설레고… 다 그런 법 아닐까.
그런데 돌이켜보니 그놈이 그놈이었고, 작정하고 날리는 멘트나 행동은 어떻게 그렇게 뻔했는지. ‘사랑을 글로 배웠어요’라고 했던가. 자꾸만 사랑을 드라마에서, 영화에서, 유튜브에서 배워 스스로 유죄 인간이기를 자청한 남자들 때문에 내 연애가 때로는 좀 더 재미있어지기도, 한없이 우스워지기도 한다.
늘 바르게 교복을 입고, 머리는 하나로 질끈 묶고, 두꺼운 안경만 쓰고 다니던 여주인공. 어느 주말 우연히 마주쳤는데, 안경을 벗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반해버린다는 순정만화 스토리는 뻔한 클리셰인 줄로만 알았다. 거래처 직원으로 만난 그는 늘 금테 안경에 셔츠 단추를 끝까지 잠그고 집과 회사, 헬스장만 오가는 바른 청년으로 통했다. 주고받는 이메일에는 한 치의 맞춤법 오류도 없어 그냥 ‘일 잘하고 착한’ 거래처 직원 정도로만 생각했는데, 회사 워크숍에서 마치 순정만화의 한 장면 같은 경험을 해버리고 말았다. 늘 단정하게 차려입던 수트 정장이 아닌 편안한 트레이닝복 차림으로 등장한 것. 안경을 벗은 얼굴은? 당연히 합격. 한결 풀어진 그 모습에 평소 그를 알던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한 번 더 눈길이 갔을 거라고 확신한다. 모두의 시선을 끌어놓고 본인은 정작 아무것도 모르는 듯한 여유로운 태도까지. 유죄인간의 모든 조건을 완벽히 충족했다. 사실 그렇다고 연인으로 발전해보고 싶은 마음은 아니고, 훈훈한 외모의 파트너와 일하는 즐거움 정도로 충분하다.
여느 날처럼 남자친구와 함께 TV를 보다가 화면 속 배우에게 시선이 딱 꽂혔다. 앳된 얼굴에 해맑은 미소, 살짝 웃는 눈매가 먼저 눈에 들어왔지만 시선이 더 오래 머무른 건 그의 몸이었다. 얼굴만 봐선 그저 해사한 어린 배우인 줄 알았는데 어깨와 팔뚝, 튼튼하게 뻗은 다리까지 그야말로 완전한 내 취향이었다. “와, 완전 내 스타일.” 의식할 겨를도 없이 뱉고 만 내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남자친구는 잠시 동공이 흔들리는 듯하더니 돌연 다이어트를 선언했다. 한 달 안에 그 배우처럼 되겠노라고. 타고난 비율까지 따라갈 순 없겠지만 어느새 말랑거리던 살이 짱짱해지고, 어깨가 벌어지기 시작한 남자친구를 보니 연애 초의 설렘이 다시 떠오르는 게 아닌가. 남자친구도 피지컬로 승부가 되는 유죄인간이었음을, 연애 n년 만에 알았다. 요즘은 그가 지치지 않고 벌크업에 정진할 수 있도록 매일 칭찬 한마디씩 당근을 던지는 중이다. 노력하는 그의 모습도 물론 보기 좋지만, 사실은 TV에서 우연히 마주친 그 어린 배우에게 더 고맙다.
나는 살면서 해본 MBTI 검사에서 단 한 번도 E가 나와본 적 없는 완벽한 내향형 인간이다. 학창 시절 이후 사회에서 친구가 된 사람들은 대부분 E 성향으로, 그들이 먼저 적극적으로 다가와준 덕에 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경우가 많았다. 연애도 마찬가지. 상대가 지속적으로 관심을 표현하고 다가와줘야 마음이 열려서 나이가 들수록 연애가 어려웠다. 지금의 남친은 과하지도, 모자라지도 않게 서서히 스며들어 와줬다. 마치 여주인공 곁에서 우직하게 자리를 지키면서 알게 모르게 도움을 주는 서브 남주 같았다고 할까. 온기가 필요한 때에 옆에 있어줬고, 한결같이 안부를 물어왔다. 나도 모르는 새 마음의 벽을 허물고 편안한 마음으로 대화하는 나를 발견했을 때, 나는 그게 사랑임을 알았다. 온도와 속도를 딱 맞춰 다가와준 그는 내 인생의 진정한 유죄인간이라 할 수 있다.
드라마 <뷰티 인사이드>의 서도재,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백이진의 말이 심장에 강하게 꽂히는 이유는 바로 ‘도치 화법’ 때문이다. ‘저랑 이번 주말에 영화 볼래요?’가 아니라 ‘영화 봐요. 나랑’ 하고 깜빡이를 켜지 않아 예측하기 어려운 매력이 있다고 할까? 문제는 이것도 적당한 때, 상황을 봐가며 써야 한다는 것. 시도 때도 없이 치고 들어오는 말투가 이렇게 배려 없이 느껴질 줄은 몰랐다. 전 남친은 도치법의 달인이었는데, 연애 초반만 하더라도 그의 돌직구 화법이 무한한 자신감으로 다가왔다. 하고 싶은 말을 먼저 내뱉는 모습이 시원시원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다툼만 생기면 상황은 180도 달라졌다. 본인 의견을 먼저 얘기하는 것까진 나도 이해한다. 그런데 문제는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면 ‘답답하다’ ‘그래서 하고 싶은 말이 뭐냐’며 다그치기 시작했다는 거다. 갈등 상황에서 전혀 의사소통이 되지 않는다고 느꼈고, 그렇게 쌓인 불만들이 헤어짐에 결정적인 원인이 됐다. 유죄인간이라는 로맨틱한 말도 그저 콩깍지가 씌었을 때나 통하는 말임을 실감했다.
한때 SNS에 ‘썸남, 썸녀 심쿵하게 하는 스킬’ 같은 게시물이 인기 있던 때가 있었다. 썸녀를 설레게 하려면 귀엽다는 듯한 눈웃음과 함께 머리를 살짝 쓰다듬으라는 둥 하이파이브를 하면서 손을 맞잡으라는 둥, 지극히 초보적이고 유치한 내용들이라 그저 웃어넘길 정도라 생각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만나는 썸남들마다 하나같이 비슷한 레퍼토리로 접근해오는 게 아닌가? 처음에야 이 사람이 나에게 진짜 관심이 있는 것처럼 착각하곤 했다. 하지만 몇 사람이나 비슷한 시기, 비슷한 스킬을 시도하는 걸 보고 있자니 이제는 그 패턴이 빤히 들여다보인다. 출처 불분명한 SNS 연애 스킬이 모두에게 먹힐 거라 생각하는 노잼 인간들 말고, 오로지 내 마음만을 저격해줄 유죄인간, 어디 없나요?
무대에서 엄청난 섹시 에너지를 내뿜던 한 아이돌 그룹의 멤버. 일상 관찰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풍덩한 사이즈의 체육복을 입은 채 젤리와 아이스크림을 한가득 품에 안고 먹기 시작한다. 그 모습에 수많은 누나들이 ‘저 덩치로도 귀여울 수 있다니’ 했다. 그 이후로 멤버의 이름이 붙은 ‘병’이 대한민국을 휩쓸었다. 피지컬이 유독 좋아 평소에도 대형견 같아서 귀엽다고 칭찬했던 구썸남도 유죄인간병을 피해가지 못했다. 먹지도 않는 간식을 매일 사다 나르지를 않나, 그동안 본 적도 없는 표정으로 애교를 부리지 않나. 심지어는 그 멤버가 입었던 체육복과 똑같은 걸 사서 데이트에 입고 나오기까지 한다. 대형견 같은 남자들의 진짜 매력은 덩치는 산만 하면서 본인이 귀여운 줄 모르는 건데, 이 남자 짚어도 한참 잘못 짚었다 싶었다. 본인한테 맞지도 않는 억지 귀여움을 장착하려니 점점 콘셉트는 산으로 가고, 결국 내가 먼저 이별을 고했다. 보기 드문 희한한 남자 경험했다 생각하고, 이 기억은 아주 깊숙이 묻어두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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