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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06. 2024

모든 이에게 처음이 그렇듯

양다리도 아니고 세 다리씩이나?|산 후안 데 오르테가까지 24km

  오래간만에 아침을 푸짐히 먹고 출발했다. 이렇게 든든하게 먹고 늦게 길을 나선건 처음인 듯하다. 같이 걸었던 은경은 아침을 잘 먹지 않았다. 걷다가 바에 들르는 일도 거의 없었고 목적지에 도착해서야 겨우 제대로 된 끼니를 먹었다. 배가 고픈 것보다 같이 걷는 게 좋아서 나도 은경에게 맞춰 식사를 느지막이 했다. 그렇게 걸으면 몸이 종일 가볍긴 했다. 반면에 동민은 잘 챙겨 먹는듯했다. 목적지에 도착하기 전에도 배고프면 중간에 때에 맞게 점심을 해결한댔는데, 오늘 아침 먹은 양을 봐서는... 다음 알베르게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 걸어도 될 것 같다.



  포도밭 사잇길이 끝나고 어느덧 소나무가 울창한 숲으로 들어섰다. 간혹 오르막이 있었지만 그늘이 자주 있어 걷기 어렵지 않았다. 동민과 나눈 대화의 주제는 그만두고 온 직장얘기부터 시답지 않은 농담까지 다양했다. 대부분 이견이 없었지만 연애 얘기는 좀 달랐다. 마치 헤어진 남녀가 입장차이를 좁히지 못하듯 우리도 다른 견해에 접점을 찾지 못해 결국 어색해지고 말았다. 동민은 화난 듯 저만치 앞서 걸었다. 나를 설득하는데 실패한 것이 기분이 나빴던 모양이다. 나도 기분이 나쁘긴 매한가지였다. 나이 차이도 얼마 나지 않으면서 혼자 세상 풍파 다 겪은 어른처럼 내 사랑(?)을 한참 어린애 취급하는 듯 느껴졌기 때문이다. 동민은 지난 연인은 지나간 것일 뿐이라며 쿨하게 말했지만 나에게 본인이 한 것처럼 역시 그렇게 하라고 강요할 순 없었다.


  나에겐 완벽히 '지난 연인'이라고 할 순 없는, 그러나 미래는 그려지지 않는 그런 인연이 있다. 그는 관계를 자주 포기했다. 마치 내가 엄마가 된 것 같이 그를 자주 돌보았다. 나는 순례길에 와서야 비로소 관계에 회의감을 갖기 시작했다... 게다가 그는 지금 수천 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다... 반면에 동민은... 이제껏 내가 본 적 없는 새로운 부류(?)의 남자다. 웃겨 미치겠는 유머와 센스까지 갖췄다. 그는 자기의 무릎 보호대를 나에게 내어줬다. 라면도 내어줬다. 혼자 걸으면서 몰랐던 순례길 팁도 알려줬다. 그러니까... 나도 모르게 조금씩 그를 의지하게 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무엇보다 같이 있으면 너무너무 재밌다. 내가 꼭꼭 숨겨 놓은 언어까지 발견하는 그의 세심한 관찰력과 센스에 나는 피어오르는 마음을 들킬까 말을 아껴야 했다. 동민은 너무나 매력적이었지만, 너무 매력적이어서 오히려 경계심마저 들었다. 또한 동민은 이제 다른 문을 열고 통과했다면, 나는 손잡이만 잡고는 마음 한 구석에 숙제처럼 남겨두고 온 연인을 떠올리며 문을 열까 말까 망설이고 있었기에, 나는 나의 속도를 존중받고 싶었다. 눈치가 빠른 동민은 어쩌면 이미 내 속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그런지 이날은 동민의 뒷모습만 기억이 난다. 성냥개비만 해졌다가 점이 되어 멀어져 가는 동민이 결국 안 보이게 되면 그와 이렇게 헤어지는 거구나 싶어 허전했다가, 어디 나무 그늘 아래 앉아 쉬고 있는 동민을 발견하면 다시금 허전했던 마음이 차오르니 이거 이 사람에게 진짜 홀려버린 건가 싶었다.



  근처에서 저녁을 사 먹고 우린 알베르게에서 만난 친구들과 수다를 떨다 잠들었다. 그리고 그날 새벽, 나는 흐느끼면서 깼다. 꿈에 첫 남자친구가 나왔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나를 위해 짜파게티와 라면과 김치를 한 아름 들고 왔다. 그때 웬 장난꾸러기들 서너 명이 나타나더니 그걸 빼앗아 도망가버렸다. 나는 온 힘을 다해 쫓아갔지만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너무 억울하고 분해서 나는 바닥에 주저앉아 엉엉 울었다. 설상가상 누가 김치를 내 눈에 막 비비기까지 했다. 눈이 매운데 김치는 아깝고, 라면은 다 도둑맞아버렸다. 나는 그만하라고 악에 받쳐 흐느끼다가 번쩍 눈을 떴다. 눈가가 촉촉했다. 이게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하는데 몇 초가 걸렸다. 진짜 눈이 따끔거렸기 때문이다. 흐린 눈을 하니 2층 침대 바닥이 보였다. 창밖으로 새벽동이 트고 있었다. 꿈이었다... 울면서 잠에서 깬 적은 처음이라 어안이 벙벙하다. 무언가 커다라고 중요한 것을 상실한 기분이 들었다. 라면일까, 짜파게티일까, 다른 무엇일까... 왜 이런 꿈을 꿨을까.


  첫 남자친구, 첫사랑, 첫 만남... 모든 이에게 처음이 그렇듯 나 역시 처음 경험하는 모든 것이 새롭고 신기했다. 덕분에 평생에 추억으로 삼을 일이 차곡차곡 쌓여갔다. 누군가에게 이만큼 사랑받을 수 있을까, 싶을 만큼 겁이 나도록 뜨거운 사랑이었다. 그와는 헤어지고 나서도 종종 연락이 닿았다. 큰 결정을 앞두고 고민에 빠졌을 때나 너무너무 외로움에 사무칠 때나 그는 마음에 알람이라도 켜진 듯 알아채고 신기하게도 나를 찾아냈다. 열이 펄펄 나던 날 아픈 몸을 질질 끌고 약을 사러 나왔는데 거짓말처럼 그에게 뭐 하냐는 연락이 왔을 때는, 그래서 '지금 갈까?'라는 말로 마음을 헤집어 놓았을 때는, 그냥 옆에 누워 그간 못다 한 말을 주절주절 다 털어놓고 싶기도 했다. 사실 그 모든 순간이 뛸뜻이 반가웠지만 나는 내색하지 못했다. 잘 사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었던 아집 같은 거였다. 내게 간절히 도움이 필요했던 순간마다 불현듯, 정말 불현듯이 찾아왔던 그 친구는 꿈에서마저 나의 도움이다. 그렇게 먹고 싶은 라면과 짜파게티와 김치를 들고 내 눈앞에 나타나다니...


  영원할 것만 같았던 그 시절은 영영 가고 없다. 순수하고도 패기 넘치는 모습의 젊은 너와 나. 우린 어렸고 세상은 내게 너무 넓었다. 그러나 폭포처럼 쏟아부어 준 사랑 덕분에 나의 공허한 시절을 잘 넘겼노라고 수신인 없이 말한 날이 수도 없다. 진작에 말할 수 있었던 수많은 기회들을 놓쳐버렸으니 힘껏 사랑하지 못한 무게를 나는 어떻게 덜어내야 할까.


  그렇게 꿈에 찾아온 남자까지 합세해 세 남자가 수면 위로 떠오르고는, 어쩐지 세 다리 걸쳐버린 찝찝한 기분이다. 미련과 미완과 미지의 남자. 그들 중 현재 미지의 세계로 등장한 동민과 함께 순례 여정중 가장 큰 도시, 부르고스로 출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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