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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01. 2024

알베르게에서 라면을 끓였더니

한국맛.. 좀 맵죠?

  자다가 몇 번을 깼다. 옆 침대에서 자던 할아버지는 밤새 기침을 얼마나 했는지 모른다. 벽을 뚫고 들어오는 한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눈뜨자마자 'so cold'로 아침인사를 나눴다. 강제기상한 김에 오늘은 일찍 걷기로 한다. 어제 자기 전에 걸을 준비를 다 마쳐놓은 상태라 부지런히 길을 나설 수 있었다. 창밖으로 어스름히 동이 터오고 있었다.


  오늘은 리오하주에서 레온주로 넘어가는 날이기도 하다. 레온 주는 스페인에서 가장 크며 유럽 연합을 통틀어서도 가장 큰 자치구에 속한다. 순례길의 꽤 긴 구간이 레온 주에 해당되니 레온 주에 들어선다는 건 3분의 1은 걸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리오하주의 마지막 마을인 그라뇽을 떠나 다음 마을로 가는 길은 손에 꼽히게 아름다웠다. 잘박 잘박 흙자갈길 밟는 소리와 앞서 걷는 순례자들의 말소리가 기분 좋게 들렸다. 가는 길에 해가 떠오르며 남아 있는 한기마저 데워지니 그야말로 완벽한 아침이었다. 아침의 싱그러움을 안고 편안한 시골 마을을 30분가량 걸었을 무렵, 리오하에서 레온 주로 넘어가는 표지판이 보인다. 산티아고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홀로 걷는 길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동네 바(bar) 아무 데나 들어가 콜라 한 잔 시켜놓고 휴식할 때의 만족감은 두말하면 입 아프고, 처음 보는 꽃들을 세어보거나 혹은 관찰하거나, 시시로 변하는 풍경을 친구 삼아보는 것이다. 좋아하는 노래를 마음껏 듣거나 흥얼거려 보는 것도 좋다. 오늘의 목적지 벨로라도(Belorado)를 앞두고 비야마요르 델 리오(Villamayor del rio) 마을 초입에 들어섰는데 공터에 앉아 쉬던 동양인과 마주쳤다. 자동반사적으로 서로 '올라'를 건넸는데 돌아오는 익숙한 언어.


 "저.. 혹시 한국분이세요?" 

 "어? 한국분이시구나!"



  한국인은 한국인을 알아본다고 했던가. 며칠 만에 듣는 한국말인지, 모국어를 들으니 무척 반갑다. 우리는 순식간에 그간의 여정을 공유하며 공감대가 생겼다. 그도 대화가 즐거웠는지, 한국 사람을 만나 반가웠는지 나와 같이 벨로라도까지만 가겠다고 한다. 더 걸을 수 있는 그에게는 미안했지만 나는 더 걸을 여력이 안 됐다. 


  동행의 이름은 동민, 나보다 나이가 조금 더 많았고 날렵한 체구인 데다 행동도 아주 빨랐으며 무엇보다 말재주가 아주 좋았다. 말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세심히 듣고 숨겨진 맥락까지 캐치하는 센스까지 있어서 얘기하다 보면 어느새 나는 꺄르르 웃고 있었다. 나도 유머로 둘째가라면 서러웠지만 그의 말재간은 도무지 따라갈 수가 없었다. 


  알베르게에 도착하니 알렉스가 반겨준다. 걸어갈 마음은 아예 접은 건지 오늘도 버스를 타고 넘어왔다고 했다. 절뚝이며 걷는 모습이 많이 안 좋아 보였다. 또 나헤라에서 같이 묵었던 일본인 노부부도 다시 만났다. 두 분은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하고 해가 잘 드는 곳에 앉아 쉬고 있었다. 반가운 마음에 손을 흔드니 환한 미소로 아는 체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 앞으로도 매일 5km에서 많으면 10km씩 걸어갈 예정이란다. 보통의 순례자들이 하루 평균 20km 정도 걷는 것과 비교해 보면 느린 페이스였지만, 돌아가는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으니 급할 것도 없었다. 천천히 여력이 되는 만큼만 걸을 거라는 할머니의 말에서 지혜와 연륜이 느껴졌다. 그리고 한참 후, 짐을 정리하고 다시 나온 나를 손짓해 부르더니 내 손에 무언갈 꼭 쥐어준다. 작은 종이학이었다.


  "소원을 들어주는 종이학이에요. 길 끝까지 잘 들고 가요."


  마음이 찡해오며 종이학에 담긴 할머니의 마음이 전해졌다. 나를 생각하며 접었을 할머니의 정성에 감동이 물밀듯 일었다. 고맙다는 말을 훌쩍 뛰어넘을 수 있는 말이 있다면 빌려오고 싶었다. 그런데 그런 말을 알지 못해 그저 눈빛과 포옹으로 고마움을 전할 뿐이었다. 아마 할머니에게도 마음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을 것이다. 나는 무슨 부적이라도 되는 것처럼 꼭 쥐고 소원을 빌었다. 


  '건강히, 무사히, 순례길 완주하게 해 주세요..'



  한편 동민은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가방에 짐이 너무 많은 것 같다며 짐을 좀 추리자고 했다. 과연 버릴 게 있을까, 꼭 필요한 것만 챙긴 건데. 자기가 정리 좀 해주겠다며 짐을 다 꺼내보란다. 막상 짐을 다 꺼내보니까 의외로 꼭 필요하지 않은 것들이 있었다. 맨소래담, 휴족시간, 한가득 챙긴 비상약, 린스, 여벌 옷... 버리기엔 미련이 남았지만 옆에서 지켜보던 동민이 다 버리라고 부추긴 덕분에 정리했다. 필요한 순례자에게 나눔도 하고 당장 쓸 수 있는 건 바로 써버리니 홀가분하다. 이걸 뭐 하려고 이고 지고 왔나 싶다.


  저녁은 동민이 비상식량으로 가지고 있던 라면이다! 한국 음식을 궁금해하던 알렉스도 초대했다. 알렉스에게 한국 음식 짱이라고 자화자찬했는데 드디어 소개해줄 기회가 생겨 한껏 기대감에 차 있었다. 우리는 늘 하던 대로 물을 끓이고, 면과 스프를 넣었다... 그런데 갑자기 여기저기서 기침소리가 터져 나왔다. 신경질적인 목소리를 퍼붓고 창문을 홱 열어젖히곤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있었다. 알렉스도 역시 기침을 했다. 라면의 매운 연기가 주방에 가득 찼기 때문이다. 이럴 수가...


 "알렉스, 그렇게 많이 매워?"

나는 눈썹 끝을 잔뜩 내리고 물었다. 알렉스는 눈물까지 글썽이며 고개를 끄덕인다. 한국의 매운맛이 이렇게 강렬했다니. 민망하고 마음에 우리는 면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도 모르고 후다닥 저녁을 해치워버렸다. 다른 순례자들에게 본의 아니게 강제로 매운맛을 선사한 게 미안해서 민망한 웃음만 날렸다. 앞으로 라면을 끓여 먹을 때는 환기를 꼭 해야겠다.(안 끓여 먹는다고는 안함ㅋ)


문제의 그 라면..


  우리는 해가 지기 전 잠깐 산책을 나와 동네 언덕에 올랐다. 아담한 마을 벨로라도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다. 동민은 사진 찍기를 좋아해서 여기저기 구도를 잡다가 멋진 구도를 발견했는지 내 모습도 한 컷 담아주었다. 오늘은 여기까지 걸어온 내게 대견하고 기특하다는 칭찬을 마구마구 해주고 싶었다. 큰 고비를 잘 넘겼다고나 할까. 다리 아파서 고생했지, 장염 걸려서 못 먹고 고생했지... 이제 잘 먹고 웃으며 걸을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 이만하면 잘하고 있다 하고 스스로를 응원해 주는 저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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