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헤라 stay 2
알렉스와의 대화가 정점에 이르렀을 때, 좀 쉬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꼬박 하루 동안 아무것도 먹지 못해서 피곤한 상태였다. 알베르게에 짐을 옮겨놓고 쉬다가 깜빡 잠이든 모양이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나, 누가 어깨를 톡톡 치며 날 깨웠다. 공립알베르게를 돌보는 오스피탈레로 할아버지들이었다.
"Are you ok? You look so bad."
"I'm not sure"라고 대답하자 어디가 아픈지 물었다. 나는 번역기로 '설사, 구토'라는 단어를 쳐서 보여주면서 오늘은 아무것도 먹지 않았다고 했다. 할아버지는 곧 약과 물 한 통을 들고 돌아왔다.
"이걸 물에 타서 마셔. 그리고 좀 괜찮아지면 수프를 끓여줄게." 나는 의심스러운 말투로 이게 무엇인지 물었다. 할아버지는 나의 경계를 이해한다는 듯 친절히 설명을 이어갔다. 이건 약국에서 사 온 약이고, 소금 같은 거라고 했다. Don't worry를 반복하며 직접 물에 약도 타주었다. 아무것도 안 먹으면 안 된다며 억지로 내 손에 쥐어주고 마시는 모습까지 꼭 봐야겠단다. 약에선 약간 포카리 맛이 났다.
나는 늘 호의를 받는 게 어려웠다. 대부분 상대의 필요를 채우려 먼저 움직이는 편이고 어쩌다 도움을 받으면 꼭 돌려줘야 직성이 풀렸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게 몸에 익숙지 않았다. 어쩌다 호의를 받아도 다시 돌려줘야 한다는 생각에 찝찝한 마음이 더 컸다. 하지만 이렇게 아프고 무기력한 상황에서 아무 조건 없는 호의를 무겁게 받는다면 어찌 이 긴 여정을 다 걷겠는가. 어려울 것이다. 사람들이 아무 이유 없이 친절을 베풀지 않을 거라는 나의 얄팍한 의심, 그리고 나는 언제나 도움을 주는 사람이라는 오만은 쓸모없는 것이었다. 다리가 아팠을 때도 병원에 데려가준 마누엘의 도움이 있었고, 저녁을 흔쾌히 대접해 준 길 위의 친구들이 있었다. 그리고 나의 느린 걸음을 맞춰 오랫동안 함께 걸어준 은경도. 나는 드디어 도움을 받을 줄 알게 된 것이다.
도움이든 호의든 잘 받아야 잘 줄 수 있다고 했던가. 내가 도움을 받기 어려워한 데는 모든 걸 다 스스로 해내야 한다는 과한 책임감, 또 상대방의 친절에는 의도가 있을 거라 생각하는 의심이 깔려 있다는 걸 알아챘다. 그리고 그 마음 기저에는 세상으로부터 나를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세상은 믿을만하지 못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스스로 나를 지켜야 한다는 믿음. 이 믿음은 어디서 시작된 걸까. 그 마음이 무척 가엽다. 그저 세상 모든 일은 혼자 해낼 수는 없다는 것을 수용하니, 그 희미한 마음이 성냥불 켜지듯 마음을 밝혔다. 그리고 내게 온 온기에 집중했다. 이렇게 호의가 넘치는 길에서 혼자 외톨이처럼 굴러가는 건 바보 같은 짓이다.
몇 시간 후, 할아버지들은 내게 컨디션을 물어왔다. not bad.라는 나의 말에 "You have to eat" 하고는 서로 스페인어를 주고받으며 어딘가로 향했다. 조금 후에 할아버지들은 고소한 냄새가 나는 수프를 가지고 왔다. "Comer(먹어요), Young lady." 할아버지들이 끓여준 수프는 꿀맛이었다. 음식이 들어가니 기운도 좀 났다. 몸이 좋지 않으면 하루 더 묵어가도 좋다는 다정한 말을 포함해 나는 순례자를 살뜰히 돌봐주는 할아버지들의 호의를 그저 온 마음으로 감사히 받아 누렸다.
'나는 호의를 받을 자격이 있어.
나는 도움을 받아도 돼.
세상은 내게 조건 없이 호의를 베풀어.
세상은 내게 늘 좋은 것을 허락해.'
이 되뇜이 내게 준 온기는 기대감과도 같았다. 나헤라에서 산티아고까지 가려면 아직 600km 넘는 여정이 남아있었다. 이후의 여정은 내게 다를 거라는 기대감이 차올랐다. 내일은 꼭 다시 길을 나설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