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신은
긴 쉼 끝에 다시 길에 오르는 날이다. 어제 수프를 먹고도 아무 탈이 없어 다행이다. 알베르게를 떠나기 전, 나를 정성스레 돌봐준 오스피탈레로 할아버지들께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전했다. '복 많이 받으시고 오래오래 사세요.' 알렉스는 같이 걷고 싶은데 다리가 아파서 고민이라고 했다. 페이스북으로 상황을 주고받기로 하고 나는 먼저 출발했다. 며칠째 양껏 먹지 못해서 그런지 몸이 가벼웠다. 꼴도 보기 싫었던 음식 생각도 나는 걸 보니 몸도 살만해진 모양이다.
순례길에 올라 처음으로 혼자다. 동행이 있다 없으니 허전했으나 먹고 싶을 때 마음대로 먹고, 쉬고 싶을 때 편하게 쉬어가고, 그만 걷고 싶으면 목적지를 수정할 수 있을 것이다. ... 라고 좋은 점을 떠올려 보지만 허전함은 지울 수가 없다. 비는 추적추적 오고, 이른 아침 동트자마자 길을 나섰더니 길 위에는 순례자들도 거의 보이지 않았다. 몇 년 전, 순례길에서 여성 한 명이 실종됐다가 며칠 만에 시체로 발견됐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아무리 순례길이라고 해도 나쁜 마음먹는 사람이 없을까 싶어 나만의 원칙을 세워 두긴 했었다.
1. 반드시 동이 튼 후에 걷는다.
2. 순례길에선 앞사람, 뒷사람들이 있는지 확인한다.
3. 해가 지기 전에 알베르게로 돌아온다.
계속 동행과 함께였으나 이제 정말 혼자이니 작은 안전장치라도 두고 걷기로 한다. 동트고 걷기는 사실 지키려고 애쓰지 않아도 지키게 됐다. 고단한 여정에 그렇게 새벽부터 눈이 떠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두 번째는 쉽지 않았다. 앞서 걷는 순례자들과 너무 멀어지지 않으려고 애썼는데 내 걸음이 느린 탓에 자꾸 격차가 벌어졌다. 뒤에 오던 순례자들도 마찬가지로 내 뒤통수에다 '올라'를 던지고 지나쳐간다. 그렇게 몇 명이 지나가니 마음이 급해지기 시작하고, 말벗은 없으니 지루하고, 길이 길게만 느껴졌다. 길 양쪽으로는 포도나무로 보이는 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다. 막 겨울을 나고 있는지라 앙상한 가지뿐이었지만 여름 내 뜨거운 태양 아래 알알이 익어갈 포도나무를 상상해 보니 심심한 풍경이 새롭게 다가온다. 푸릇푸릇 자라고 있는 풀들과 봄이 거의 다 왔다는 걸 알리듯 흐드러지게 피어있는 꽃, 도심에 살면서는 보기 힘들었던 탁 트인 하늘과 끝없이 이어진 평야... 때마침 풍경과 꼭 닮은 노래가 맴돈다.
In the twinkling stars that dance like fireflies
반딧불이처럼 반짝이는 별들 속에서
In the blushing fruit that hangs upon the vine
덩굴에 매달린 붉게 익은 과일에서
In the face of a baby as he forms his first smile
처음 미소 짓는 아기의 얼굴에서
I see you
나는 당신을 봅니다
In the whisper of the wind's soft lullaby
자장가 같은 바람의 부드러운 속삭임 속에서
In the laughter and the roar of the rushing tide
밀려오는 파도의 웃음과 외침 속에서
In the song of a sparrow as he takes his first flight
첫 비행을 하는 참새의 노래 속에서
I hear you
나는 당신을 듣습니다
그리고 '당신'이라고 부르는 존재에게 질문한다. 왜 이름 없고 잊힌 사람들 속에 숨어있는지. 왜 환히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작고 보잘것없는 것들을 빌어 찾는 이의 눈에만 보이는지. 왜 버려진 길을 외롭게 걷는지. 그러나 결국 명쾌한 답은 없고 그저 계속 깊이 들여다보고 귀 기울여 듣고 사랑하는 것이 할 일이라는 단단한 목소리가 마음을 울렸다.
난 오랫동안 종교생활을 했고 신의 존재를 별 비판 없이 믿었다. 20대 청춘을 다 바쳐 열심히 교회를 다니면서 착하다 칭찬받는 생활을 마치 나 그 자체로 여기며 살았다. 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자 안전기지이자 두 번째 가족이나 다름없던 곳. 그런데 가끔은 답답하고 이해할 수 없는 영역도 있었다. 내가 믿는 신은 교회 안에는 확실히 있었는데 교회 밖의 삶을 살 땐 긴가민가 했다. 적어도 나의 삶은 그랬다. 매일의 출근길엔 하루에 대한 기대감보다 어서 퇴근하고 싶다는 생각이 더 컸다. 하루를 잘 버티고 기진맥진한 몸뚱이를 끌고 퇴근하는 길엔 어쩐지 허무한 마음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와중에도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소소한 행복들을 감사로 여기는 순간이 있었기 때문에 신의 완벽하게 부재했다고 볼 순 없지만, 아무쪼록 그렇게 1년, 2년이 지나가길 버티는 삶이었다. 그래도 교회에 가면 좋았다. 힘든 일주일을 살아내고 신에게 의지해 위로받고 또 한 주를 살아갈 힘을 충전해 가는 것 같았다. 그런데 교회 안에선 확실히 존재하는 것 같은 신이, 바로 나를 만들었다는 그 신이, 그리고 세상을 만들기까지 했다는 신이, 그렇게나 존재감이 있는 존재가 일주일 중 절반이 넘는 나의 일상에선 왜 희미하고 흐릿하게 존재해야만 했을까.
신은 숨어있다. 내가 귀 기울여 듣기만 하면, 시야를 조금만 머물기만 하면 되는 보잘것없는 일상에 늘 숨어 있었다. 늘 해치우기 바빴던 나의 일상. 먹고, 자고, 싸고, 일하고 살아가는 평범한 나의 일상 곳곳에. 내가 지겹다고 소홀히 지나가 버리던 일상의 풍경에 존재했다. 굳은 몸을 녹여주는 아침 햇살, 한낮에 겨드랑이 사이로 지나가며 땀을 식혀주는 바람, 이제 막 피어나는 봄 꽃들... 작은 아이들의 낙서 속에, '올라'하고 인사하는 순례자들의 말속에, 안부를 챙기는 사람들의 호의 속에도 존재했다.
나의 일상에는 부재한다고 생각했던 신이 이렇게 가까이 느껴진 적이 있을까? 작은 꽃들도, 새들도 살펴 돌본다는 말씀이 마치 새로운 책이 되어 펼쳐진 기분이다. 먹고, 자고, 싸고, 걷는 평범하기 짝이 없는 순례의 일상이 거룩하게까지 느껴진다. 이 부상조차도, 그래서 느리게 걸을 수밖에 없는 시간조차도 내게 소중한 선물처럼 여겨진다. 마음에서 무언가 사라지는 것 같았다. 어떤 집착 같은 것이었다. 내가 이 길을 꼭 끝까지 걸어야 한다는 마음도, 이 길에서 내 인생의 해답을 꼭 찾아내겠다는 간절한 마음도 녹아내리면서 그저 지금, 현재, 아픈 몸을 보살피며 하루에 잘 '존재'해보자고 다짐한다.
고요한 마음을 안고 느끼며 천천히 걸었더니 목적지인 그라뇽에 좀 늦게 이르렀다. 그런데 마을 초입에서 갑자기 박수와 환호소리가 들렸다. 바 앞에 앉아 있던 순례자들이었다. 그들은 나를 보고 환하게 웃으며 "You made it!" 하고 외쳤다. 바로 나에게 쳐주는 박수와 환호였다. 나를 앞질러 지나쳐가던 순례자들은 이미 도착해서 한바탕 쉬고 있었다.
그들은 잠깐 쉬었다 가라며 자리로 나를 부르더니 내가 못 걷고 집에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걸어와서 놀랐다고 했다. 친구들 중 한 명은 무릎 통증에 잘 든다는 약도 발라주었다. 나는 쭈구리처럼 '그라시아스 그라시아스'하고 연신 고맙다는 말만 반복했다. 나는 환호와 격려에 어리둥절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또 자랑스럽기도 한 정의할 수 없는 기분에 갸우뚱했지만 어쨌거나 오늘의 목적지에 도착했음에 안도했다. 또 나의 일상에 친근한 모습으로 보인 신에게 깊이 감사했다.
마침 알렉스도 그라뇽에 와있었다. 나보다 늦게 출발했는데, 어떻게 이렇게 빨리 도착했냐 물으니 무릎이 아파서 버스를 타고 왔다고 해맑게 대답하는 알렉스. 나는 다시 만난 알렉스에게 오늘의 심정을 다 낱낱이 말할 수 없어 아쉬울 뿐이었다. 그래, 원래 소중한 것은 보물처럼 깊이 간직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