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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Feb 20. 2024

청춘 남녀의 지대한 관심사

는 서로의 언어|나헤라 stay 1

 "So, Where are you now?"

지난번 에스테야에서 만났던 알렉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반가움에 화들짝 놀라 일어났다.


  알렉스는 며칠 전 에스떼야에서  다리가 아파 쉬어가던 순례자 중 한 명이었다. 테라스에 앉아 하루를 정리하던 저녁에 우리는 처음 만났다. 나는 다이어리를 쓰면서 음악을 들으려고 이어폰을 꽂으려다가 실수로 이어폰과 핸드폰을 연결하는 케이블을 귀에다 꽂아버리는 바람에 놀라서 이상한 소리를 냈다. 그때 나를 보고 박장대소를 한 애가 바로 알렉스이다. '유 쏘 퍼니~' 라며 낄낄거리는 걔가 더 웃겨 나도 '오 마이 미스테이크^^' 하고 멍청하게 웃어 보였다. 그렇게 인연을 맺은 알렉스에게 연락이 온 것이다.


'지금 나헤라. 아파서 며칠 쉬었다 가려고.'

'나는 전전마을이야. 다리 아파서 많이 못 걸었어. 내일 버스 타고 너 있는 데로 갈게.'






  그렇게 알렉스가 나헤라로 왔다. 잠깐의 대화로 맺어진 인연이 버스를 타고 날아온 것이다. 알렉스는 그리스 출신으로 언어를 가르치는 선생이다. 그리스어는 물론 영어, 스페인어까지 할 줄 아는 언어에 능통한 친구였다. 어쩐지 내가 개떡같이 말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게 예사롭지 않다 했다. 두 번째 만남에야 우리는 오래 대화다운 대화를 나누며 친구가 되었다.


  청춘 남녀의 지대한 관심사는 시시하게도 짝이 없게 서로의 언어였다. 나는 이제껏 외워온 몇 가지 생존 스페인어를 알렉스에게 자랑하듯 늘어놓았다.


  Hola!(안녕!), Mui bien(정말 좋아요), Gracias(고맙습니다). Tengo hambre(배고파요), Donde eata el bano?(화장실 어디 있어요?)... 알렉스는 유치원 꼬마 수준의 스페인어 구사에도 대단하다며 엄지를 치켜세웠다. 학생의 마음을 잘 아는 선생님임에 틀림없다. 나도 질세라 한국어에 관심을 갖는 알렉스에게 한글을 소개했다.


  "한글은 읽고 쓰기가 무척 쉬워. 원리만 알면 하루 만에 읽고 쓸 수 있어." 나는 한글 자음 모음을 배열해 읽는 방법을 알려주었다. 알렉스는 언어 선생님이라 그런지 무척 빠르게 언어를 습득하고 머지않아 스스로 쓰기까지 했다. 우리는 영어, 한국어, 스페인어를 섞어가며 서로의 언어를 배웠다. 한참 머리를 쓰며 대화하다 보니 배가 고파졌다. 나는 배 위에 손을 얹고 알렉스에게 Tengo hambre(배고파)라고 말했다. 그런데 알렉스가 갑자기 막 웃는 것이다. 알렉스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하고 있는 내게 낄낄거리며 말했다. "Tengo hombre는 나 남자 있어요,라는 말이야." 아무래도 내가 '암브레(hambre)' 발음을 '옴브레(hombre)'라고 잘못했던 모양이다. 알렉스는 웃기다며 내 등짝을 팍팍 쳤다. 한바탕 웃고 나서 알렉스는 이어 물었다.


"그래서, 너 남자 친구 있어?"



나는 잠깐 망설였지만 곧이어 대답했다.


"아니, 지금은 없어." 반만 진실이고 반은 거짓인 말을 하고서는 기분이 묘했다.


"나도. 지금은 없어." 알렉스는 5년이나 사귄 사람이 있었다며 운을 띄웠다. 오랫동안 같이 살았고 서로 잘 맞았다던 여자친구. 그런데 갑자기 다른 남자가 생겼다고 했다.


"근데 걔가 날 버렸어. 나쁜 년"

"그래. 나쁜 년이네."


  나는 나에게 향한 건지, 알렉스의 전 여자친구에게 향한 건지 모를 말을 읊조렸다. 우리는 다투듯 서로의 언어를 탐하다가 문득 서로의 지독한 사랑을 질투하고 있음을 깨달았다.


  "결국 1년쯤 지나면 뜨거운 감정은 다 식는 것 같아. 그 이후의 사랑은 선택이라고 생각해. 사랑하기로 선택하는 거. 결국 어떤 사랑이던 위기가 올 텐데, 그때마다 선택하는 거지. 그런데 이 선택은 일방적이여서는 안돼"

얼렁뚱땅 조잡한 영어로 말했지만 알렉스는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찰떡같이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너는 사랑하기로 계속 선택했어?"

"음, 아니. 이제는 포기했어." 나의 이미 지났다는 듯 과거형으로, 그리고 다짐하듯 이어 말했다.

"계속 포기만 하는 사람을 만나고 싶지 않아."


  우리는 낯선 언어로 서로의 사랑과 분노를 말하고 들었다. 하나로 수렴하는 감정 앞에 우리는 언어의 장벽도 뛰어넘고 시간 가는 줄 몰랐다. 알렉스는 'I love you'는 한국어로 어떻게 발음하는지 물었다. 나는 '사랑해'라고 말했다. 영특한 알렉스는 한글로 서툴게 'ㅅㅏ 랑 ㅎㅐ?'라고 적어 내게 보여줬다. 우리는 작은 강이 흐르는 풍경을 마주하고 한참 서로를 궁금해하고 배웠다. 내리쬐는 봄볕이 무척이나 따사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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