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우내 Feb 13. 2024

진정한 순례자는!

먹기 위해 걷는다!

  마누엘이 자기 길을 떠났다. 화살표가 없는 길인데 마치 아는 길인 듯 웬 언덕을 가리켜 보였다. 제대로 된 작별인사도 없이 쿨한 인사를 나누고 휘적휘적 제 갈길을 간 마누엘. 첫 만남도 헤어짐도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휘리릭이다. 마누엘이 언덕 너머로 사라질 때까지 손을 흔들어 보였다. 길에서 만난 인연은 길에서 헤어지는 거라고 했다. 헤어져도 또 다음 숙소에서 우연히 만나게 되는 게 순례길 걷는 즐거움이 아닌가. 은경과 나는 마누엘을 보내고 비아나로 향했다.


  순례길을 걷다 보면 종종 순례자들을 위해 음식이나 물건을 기부하는 사람들을 만난다. 오늘은 순례자들을 위해 기타와 노래를 선물해 준 멋진 아티스트도 만나고, 에스떼야에서 함께 머물렀던 아일랜드 음악가 친구도 마주쳤다. 길에서 만난 인연들과 잠깐 쉬었다 가며 담소도 나누고 그들이 건네준 맥주도 마셨다. 뜨거운 태양아래 쉬어가며 낮술이라니... 알쓰에게 짜릿하기만 한 순간이다.


  은경과 부지런히 걸어 비아나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해 질 녘에 산책을 나왔다. 지는 해가 건물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는데 자꾸 보고 싶은, 여운이 남는 풍경이었다. 비아나는 금방 둘러봐도 30분이 채 안 걸리는 작은 마을이라 걷다가 작은 언덕에 올랐다. 은경과 함께 해가 질 때까지 한참을 앉아서 하루를 정리했다. 멀지 않은 곳에 내일이면 들어갈 두 번째 대도시, 로그로뇨가 반짝이고 있었다. 





  비아나에서 로그로뇨까지는 10km가 채 되지 않는다. 로그로뇨는 라 리오하 지방의 수도로 꽤 큰 규모를 자랑한다. 은경과 나도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풍부한 로그로뇨를 그냥 지나치기는 아쉬워 하루 머물며 도시를 둘러보기로 했다. 인터넷에 '로그로뇨 맛집'을 검색하자 유명한 타파스바들이 나왔다. 그중 양송이 타파스로 유명한 'Bar Angel'을 비롯해 이름난 타파스바들이 죽 들어선 골목이 무척 기대된다. 특히 리오하 지방의 와인은 맛 좋고 향 좋기로 유명하니 꼭 마셔보리라!


  어제 짐 없이 걷고 잘 쉰 덕분인지 무릎의 통증은 많이 줄었고 오늘도 2시간 남짓만 걸으면 돼서 마음이 가벼웠다. 몸의 신호를 살펴 걸어야 함을 깨달아 다행이다. 길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어떤 순례자가 작은 돌들을 모아 만들어 놓은 화살표가 보였다. 순례길은 보통 노란 화살표를 보고 따라 걷는데 잠깐 딴생각을 하다가 화살표를 놓치면 엉뚱한 길로 한참 걸을 수 있으니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잘 살펴봐야 한다. 반대로 화살표를 따라 잘 걸어도 오래도록 노란 화살표가 안 보일 때가 있는데 그러면 또 불안이 엄습해 온다. 800km 가까운 길을 사람들이 표시해 둔 노란 화살표를 의지해 걷는다니, GPS며 지도며 인터넷이 안 터지는 곳을 찾아보기가 더 힘든 시대에 참 아이러니한 여정이 아닌가. 그런 와중에 어제 아침 마누엘은 화살표가 그려진 길을 벗어나 홀로 다른 길을 개척(?)하러 떠났다. 모두에게 주어진 길이지만 마누엘처럼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걷지 않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하루에 부지런히 걸어 45km를 걷는 사람도 있고 여건상 매일 짐을 보내고 걷는 사람도 있다. 자전거를 타고 달리기도 하며 버스나 기차로 몇 구간을 스킵하기도 한다. 올해는 300km를 걷고 내년에 남은 여정을 기약하고 돌아가는 사람도 있다. 길의 부름을 받아야 오를 수 있다는 산티아고 순례길, 자기만의 방법으로 자기 속도에 맞게, 능력에 맞게 걸어가며 자신의 이야기를 쓰는 길. 물론 내 한계나 능력치를 미리 알고 걷는다면 가장 최고겠지만 이 신비한 길은 내가 믿었던 나의 능력과 의지를 보란 듯이 무기력하게 만들고, 내가 할 수 없을 것 같던 일에는 오히려 용기를 갖고 나아가게 한다. 내가 알지 못했던 혹은 모른 척하고 있었던 내면이 들끓기 시작하며 질문을 던져오는 길, 앞으로 내가 어떤 모습으로 살고 싶은지, 어떻게 사람구실 하며 살건지 궁금증을 갖고 계속 나아가게 만든다. 답을 찾아가기는커녕 오히려 더 많은 질문들 앞에 던져진다는 게 아이러니하지만..




  그렇게 2시간 무렵 걸었을까, 흙길을 벗어나 잘 정돈된 아스팔로 길로 접어들었다. 로그로뇨의 초입은 도시 느낌이 물씬 났다. 대도시라고 건물부터 느낌이 다르다. 유럽의 오래된 건물과 신식 건물이 조화롭게 어울려 있고 도로도 걷기 좋게 닦여있다. 은경과 나는 무척 설렜다. 오는 내내 들뜬 마음으로 이야기한 주제, 바로 대형 마트 '까르푸'에 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물가도 보고 필요한 물건도 사고 구경할 겸 마트 들를 생각에 신바람이 났다. 마침 가는 길이라 각자 필요한 물품도 샀고 마음도 든든해졌다.




  우리는 잠깐 쉬다 나와 타파스 바에 들렀다. 타파스를 시켜놓고 맛있다고 꺅꺅거리며 먹고 있는데 옆자리에 있던 할아버지가 스페인어로 말을 걸어오셨다. 그러면서 와인을 하나 추천해 주시길래 반신반의하며 마셨는데 ... 정말 W.O.W 였다. 눈이 똥그래질 정도로 맛있어서 '무이비엔'을 몇 번 외쳤는지 모르겠다. 할아버지는 흡족한 미소와 함께 엄지를 척 올리며 우리를 배웅해 줬다. 와인 한 잔으로 알딸딸해지니 기분도 좋아 은경에게 젤라또도 사고, 오늘만큼은 순례자 신분을 벗고 여행 온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거리에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기 시작하더니 길 저쪽 끝에서 북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이어 깃발과 십자가를 들고 걸어오는 무리가 나타났다. 다들 근엄하고 웃음기 없는 진지한 얼굴로 행진하고 있었다. 떠올려보니 부활절을 앞두고 고난주간이 시작되는 날이었다. 스페인은 가톨릭의 나라로 작은 마을이나 큰 마을이나 종교의 절기를 나라 전체에서 즐기는 듯했다. 꽤 크고 긴 행렬이었다. 예수의 희생과 사랑의 마음을 기억하며 나도 마음을 실어 보냈다.





  산티아고까지는 610km가 남았다. 낯선 곳에서 맞이하는 부활주일은 어떨까, 종교를 삶처럼 가까이 두고 사는 나라의 부활주일이 기대가 됐다. 오늘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와인도 맛보고, 낮술도 해보고, 여행자처럼 맛집도 골라 다녔다. 잠깐 놀이터에 온 아이처럼 신나게도 놀았다. 이제 다시 산티아고를 향해 부지런히 걸어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