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데 저.. 스페인어 잘 못하는데욥..
결국 무릎이 너무 아파 밤잠을 설쳤다. 걷는 것은 고사하고 날이 밝는대로 병원에 다녀왔다. 도착해서 접수 후 진료까지 2시간 가까이 대기, 진료 5분, 수납까지 또 1시간 대기. 5분 진료를 위해 3시간을 기다리다니. 빨리빨리 대한민국에선 상상도 못 할 시스템이었다. 긴 기다림 끝에 겨우겨우 만난 의사 선생님은 구글 번역기까지 동원해 친절히 설명해 주었다.
'염증', '하루에 한 알', '휴식'
그렇게 자의 반, 타의 반으로 갖게 된 에스떼야에서 휴식시간. 은경도 무리했는지 무릎이 아프다며 하루 같이 쉬어가기로 했다. 지난 숙소에서 만났던 마누엘도 마침 무릎 부상으로 쉬어간단다. 마누엘은 무릎 통증에 약을 처방받을 만한 현지 병원을 찾아 직접 안내해 주고 긴 시간을 함께 기다려주었다. 순례길을 시작한 지 6일째, 부상자들은 그렇게 에스떼야에서 하루 머무르기로 했다.
하루 쉬어가며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이 조금 늦어지는 건 아무렴 상관없었다. 빨리 도착하기 위해 걷기 시작한 게 아님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순례길 이후의 일정도 딱히 잡아두지 않은 건 이런 변수에 쫓기듯이 걷고 싶지 않아서이다. 마침 숙소에는 부상으로 인해 쉬어간다는 순례자들이 꽤 있었다. 용서의 언덕이 나에게만 가혹했던 게 아닌가 보다. 순례자들은 밀린 빨래를 하고 낮잠을 잤다. 함께 어울려 요리를 하기도, 산책을 가기도 했다. 국적도 언어도 다른 사람들이 모여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을 보자니 혼자 왔어도 함께 걷는 길이라는 말이 실감 났다. 그중 기타를 들고 다니던 아일랜드 친구의 노래를 흐뭇하게 듣고 있는데,
"You wanna sing?"
하고 묻는다. 좀 수줍었지만 용기내 목소리를 내봤다. 우리는 같이 어떤 영화의 OST를 부르고, 또 연이어 다른 노래도 흥얼거렸다. 몇 마디 대화는 하지 않았지만 노래는 사람의 마음과 마음을 이어주는 '마법같은' 수단임을 체감했다. 공간에 있던 모두가 즐거이 노래만으로 연결되니 마음이 벅찼다.
친구가 되는데 언어가 큰 장벽이 되는 게 아니라는 걸 실감하게 한 최고의 친구는 바로 마누엘이다.
마누엘은 나의 뜨문뜨문한 스페인어 실력을 알면서도 전혀 아랑곳 않고 모든 말에 아주 빠른 스페인어로 대답하는 귀여운 아저씨다. 여느 순례자들이랑은 다르게 짐도 무척 조촐하다. 소지품 몇 개만 달랑 들어간 아주 작은 백팩을 메고 다니며 뒤뚱뒤뚱 걷는다. 크고 짙은 쌍꺼풀을 가졌고 웃을 때는 더 귀여워지는 동글동글한 얼굴을 했다. 내가 본 거의 대부분의 날에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었고 날이 갈수록 덥수룩해지는 수염으로 더 동글동글해 보였던 마누엘.
마누엘은 절뚝거리는 나를 케어해주고 돌아오는 길에 달달한 간식까지 사주더니 은경과 내게 저녁까지 차려주겠단다. 뭘 먹고 싶냐 물어보고는 휘리릭 나갔다 돌아온 그의 손에는 홍합과 새우가 들려있었다. 은경과 나는 아직까지 빠에야를 먹어보지 못해서 무척 신이 났다. 스페인 현지인의 스페인 요리라니! 음식을 준비하는 동안 마누엘은 여전히 알아듣지 못하는 스페인어로 요리 과정을 설명해 주고, 나와 은경은 한국말로 대답을 하는데 신기하게 대화가 통하니 여간 웃긴 일이 아니었다. 역시 대화는 기세인 것인가.. 알아듣거나 말거나 일단 내 할 말 한다는 마누엘 덕분에(?)ㅋㅋ 대화는 언어 그 자체가 다가 아니라는 공식을 깨우쳤다.
마누엘표 빠에야를 고맙게 먹고, 내일 아침은 은경과 내가 대접하기로 했다. 함께 쉬는 하루 종일 마누엘이 밑도 끝도 없이 스페인어를 쏟아내는 통에 은경과 나는 이렇게 일주일만 더 같이 있으면 웬만한 스페인어는 하게 될 것 같은 생각까지 들었다. 하긴, 마누엘은 어떤면에선 꽤 괜찮은 선생님이기도 했다. 조금 뜬금없긴 하지만, 갑자기 하늘을 가리키며 "누베, 누베" 한다. 그러면 은경과 나는 그게 뭐냐고 묻는다. 돌아오는 건 장황한 스페인어뿐이니 무슨 뜻인지 알턱 없는 우리는 번역기를 돌려 누베가 '구름'이라는 걸 알아낸다. "아, 누베가 구름이야?" 말하면 마누엘은 또 그 말을 어찌 알아듣는지 "Si, si (응, 응)" 하고 대답하는데, 은경과 나는 이런식으로 다짜고짜 몇 가지 스페인어를 배웠는지 모른다.
cerveza, por favor (맥주플리즈~)
basura (쓰레기)
blanco (하얀색)
árbol (나무)
río (강)
pan (빵)
bien bien (맛있어 맛있어~ 혹은 좋아 좋아~)
Estoy mal (나 상태 진짜 안 좋아...)
등등.. 마누엘로부터 생존 스페인어를 배운 덕에 발화에 용기가 듬뿍 생겼다.
마누엘과 함께하는 동안 반짝 익힌 스페인어가 남은 순례길에 얼마나 큰 도움을 주었는지, 마누엘에게 전할 수 있다면 좋겠다. 귀여운 딸들을 집에 두고 무슨 이유로 혼자 순례길을 걷고 있는지 궁금했지만 짧은 언어로는 미처 다 이해할 수 없었다. 영어로라도 대화해보고자 하는 나와 은경의 노력이 무색하게 마누엘은 간단한 말조차 모두 스페인어로 하려고 했으니까..ㅋㅋㅋ 그렇게 우리를 스페인어로 홀딱 홀려버린 마성의 남자 마누엘은 우리의 첫 번째 스페인 친구이자, 수호천사로 남았다.
쉬어가면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있을 줄 알았는데, 친구들과 어울리다보니 쉬는 하루도 금방 지나가버렸다. 덕분에 금방이라도 으스러질것 같았던 무릎이 호강했다. 복잡했던 마음은 오히려 함께 어울리며 휘발됐다. 하루 동안 두고온 벗 생각도, 가족 생각도 나지 않을 만큼 무척 잘 쉬고 잘 먹고 잘 웃었다. 도움의 손길로 부족함 없었던 하루. 나는 조금씩 주변을 의지하는 법도 터득하고 있던 모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