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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Oct 18. 2023

요섹남으로부터

뚝딱 요리 천재


삼일 만의 첫 대도시라니, 눈을 뜨자마자 설렜다. 오늘의 목적지인 팜플로냐는 순례길 루트에서 맞이하는 첫번째 도시이자, 여름이면 '산 페르민'이라고 불리는 소몰이 축제로 유명한 관광지이다. 거기다 헤밍웨이가 자주 들러 글을 썼다는 카페 '이루냐'로 유명하기도 하다. 시골 풍경이 조금 지루하게 느껴질 때쯤 등장하는 도시라 기대되는 마음이 컸으나 여전히 여러 사람과 함께 장소를 공유하는 것에 대한 긴장감이 있었다. 모국어 외의 언어사용이나 아직 몸에 익지 않은 하루 루틴 등, 아직 모든 것이 익숙하지 않아 긴장한 마음은 아주 실낱같았지만 모른채하기 어려웠다.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 불편한 느낌과 함께 말없이 한참을 걸었다. 종종 야옹거리며 다가오는 고양이를  보면 잠깐 인사 나누는게 다였다. 갑자기 비도 쏟아지는 바람에 길마저 질퍽해지고 체력소모가 심해졌다. 마땅히 점심을 먹을 곳도 없어 배가 매우 고팠다. 첫날 호되게 당해놓고 주전부리라도 안챙기는 패기는 뭐람. 일단은 바(Bar)나 작은 슈퍼라도 나올때까지 걸어보기로 했는데 웬걸, 빈속으로 팜플로냐에 도착해버렸다. 


"내일은 꼭 아침을 챙기자"


은경과 나는 이말을 끝으로 말을 잃은지 오래였다. 




설레지 않을 수 없는 팜플로냐 초입



둘이 다시 생기를 찾은건 오후무렵, 푸릇푸릇한 풍경은 옅어져가고 길게 늘어선 건물들로 시작된 팜플로냐 초입에 이르러서였다. 비가 넓게 내렸는지 팜플로냐도 비로 젖어 촉촉했다. 대도시라니, 설레는 마음으로 허겁지겁 짐을 풀고 부리나케 마트로 달려갔다.




아찔해.. 군침도는 피자행렬



마트는 그 나라 사람들의 일상을 공유하는 즐거움을 주는 장소인 동시에 허기짐과 함께 걷는 순례자에게 나타나면 그토록 반가운 장소. 투우의 도시로 유명한 만큼 붉은 색을 테마로한 장식품이나 축제 풍경을 담은 엽서들을 판매하는 상점들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예쁜 기념품이 눈에 들어와 사고 싶은 마음이 들었지만 아직 갈길이 구만리이므로.. 짐을 보태선 안된다. 




늦은 점심을 먹고 쉬고 있는데 익숙한 한국말이 들려 나도 모르게 귀가 쫑긋섰다. 또 다른 한국 사람들이다. 생기가 넘치는 내나이 또래의 커플과, 론세스바예스에서 마주친적 있던 자유분방한 느낌의 긴머리 남자 현. 우리는 저녁을 같이 먹기로 했다. 첫 도시를 기념할 겸 팜플로냐 시내로 나갈까 하다 장을 봐와 요리를 해먹기로 했다. 메뉴는 무려 닭백숙! 흥미를 보이는 다른 외국인 친구도 함께해 저녁을 한상 차려보니 한국 생각이 절로 났다. 



H를 필두로 한껏 차려본 5유로짜리 식탁



오늘의 주방장, 현은 나랑 나이가 같다. 경험 많은 티가 폴폴 나더니 닭백숙도 뚝딱, 손쉽게 해낸다. 현의 라이프스토리를 듣자하니 꽤나 자유롭게 살아온 것 같다. 어딜 가더라도 잘 적응하고 살것 같은 다부짐 또한 느껴졌다. 영국에 있는 게스트하우스에서도 살아봤고 워홀도 하며 많은 경험을 재산으로 삼은 현이 멋졌다. 어디에 가든 할 일이 있고, 어디서든 잘 적응하는 능력이 있어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 특히 섹시하게 제2외국어를 구사하며, 이제껏 살아온 패턴과 다른 패턴으로 살아보고 싶은 마음은 나에게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특별한 사람에게나 주어지는 특권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이 없어 관심없는 척 했지만 나의 바람을 현 직면시켜주었다. 모른 채 하고 있던 열망이 비집고 나와 숨을 하, 내뱉는 순간. 나는 그간 나를 부른 마음을 알아챘다. 나에게 기회가 온다면 한국에 있는 가족, 소중한 친구들, 이제껏 이뤄온것 등등 모든걸 뒤로하고 떠날 수 있을까?... 



현이 끓인 닭백숙은 정말 맛있었다. 이렇게 간단하게 끓일 수 있는 음식이라니. 물에 파, 양파, 닭 넣고 푹 끓이면 완성인 맛있고 간단한 음식을 그동안 왜 안해먹었을까. 보통 순례자 메뉴(Menu del Dia)로 제공되는 음식이 10유로부터 시작되는데 우리는 엄청 푸짐하게 먹고도 5유로씩밖에 들지 않았다. 돈을 아끼려면 음식을 해먹는게 좋겠다. 스페인의 저렴한 물가를 새삼 실감하며 와인도 한 잔씩 걸치고나니 한오라기 남았던 긴장마저 다 풀어지고 말았다. 다들 발그레한 얼굴로 순례길 세번째 날을 기념하며 날이 저물었다.



이맛 못잊어..



8시가 좀 더 넘어서야 해가 다 넘어갔다. 막 꽃을 틔우기 직전의 아슬아슬한 목련과 어스름한 하늘 색이 우아하게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한국도 이즈음 목련이 필 것이다. 잘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다짜고짜 순례길을 간다고 통보한 딸이 앞으로 어쩔생각인지 걱정이 한가득인 부모님에게 안부 인사도 전했다. 



'힘들면 다 걷지 말고, 그냥 돌아와. 우리 딸 화이팅'



다 못걸어도 괜찮으니까 힘들면 돌아오라는 말에 무슨소리냐, 순례길은 이제 시작인데! 라고 대꾸했다. 나와 한 약속을 지키기 위해 죽이되든 밥이되든 부딪혀 보고 싶은 마음, 그리고 현으로부터 온 질문에 답하기 위해 나의 마음을 조금 더 살펴보고 싶은 욕구가 차올랐다.



자기 전 이제 막 아침을 맞이하고 있을 남자친구에게 메시지를 남겼다.

'잘 잤어? 오늘은 너무 배고프게 걸었어. ... 한국에도 지금쯤 목련이 폈으려나.' 

나는 허공에 떠도는 이야기 몇 개만 써내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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