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절 주의보
오늘도 은경과 함께 걷기 시작했다. 비가 오고 난 다음날 아침이어서 평소보다 더 풀내음이 짙었다. 도시를 빠져나오며 만난 근교 풍경은 다시 설렘으로 가득 차기에 충분했다. 오늘은 '용서의 언덕'을 넘어야 한다. 긴 오르막과 긴 내리막을 넘어 거의 25km를 걸어야 하기에 요깃거리도 챙겨 길을 나섰다. 말수가 많이 없는 은경, 함께 걸은 지 3일째인데 그녀에 대해 아는 바가 별로 없다. 나보다 나이가 어림. 그리고 혼자 시베리아 횡단철도를 타봄. 아이슬란드에 도착해서 며칠 동안 혼자 차박도 해봄. 웃을 때 무척 귀여움... 내가 아는 것은 이게 다였다.
어제는 비도 오고 길도 좁아서 나란히 걷기 어려웠는데 오늘은 셋이 같이 걸을 수 있을 만큼 길이 넓다. 도란도란 얘기하다 보니 아빠 얘기를 나누게 됐다. 은경의 아버지는 은경을 무척 믿고 지지하는 듯했다. 진로를 고민하는 중에 훌쩍 떠난 여행도, 순례길행도 다 재산이 될 거라며 응원해주셨다고 한다.
"오래 여행하는데 부모님이 걱정 안 하셔?"
"뭐 알아서 할 거라고 생각하시는 거 같아요."
은경의 카톡 배경화면엔 아빠와 나눈 대화가 캡쳐되어 있었다. 아빠는 '다른 사람이 좋아하는 거 말고 네가 좋아하는 거, 바로 그걸 하라'고 했다. 은경의 단단함이 어디로부터 온 것인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남들 다하는 연애애도 큰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자기 자신에게 관심이 있었다. 20대 내내 연애사가 가장 큰 관심이었던 나와는 다르게, 은경은 내가 어떤 사람인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불편해하는지 여행을 통해 하나씩 깨우쳐가는 중이었다. 은경은 타인에게서가 아닌, 스스로에게 묻고 있었다. 내가 누구인지.
드넓은 초원이 펼쳐진 오르막을 굽이굽이 올라 그간 올라온 길, 우리가 지나온 마을까지 한눈에 들어오는 언덕 꼭대기에 다다랐다.
"와-"
탄성이 나오는 풍경이었다. 바람도 송송 불어 땀을 다 식혀주었다. 내내 이어졌던 오르막에 불평하던 마음까지 싹 씻겨내려갔다. 우리는 빵조각을 우적우적 나눠먹고 용서의 언덕 앞에 섰다. 순례자들이 줄지어 걸어가는 철로 만든 작품 옆에 서울까지 9700km, 산티아고까지 550km라고 써진 표지판이 있었다. 서울까지 꽤나 먼 거리였다. 9700이라는 숫자에서 느껴지는 거리감에서 나는 비로소 미워하고 또 사랑하는 대한민국을 떠나, 딸로서, 친구로서, 여자친구로서, 직장인으로서, 어떠한 소속감도 없이 누구를 만족시켜주지 않아도 되는, 성취하지 않아도 되는, 그러니까 지금 내가 무언갈 이루지 않고 어떤 상태여도 괜찮은 곳에 와있다는 게 실감 나기 시작했다.
나는 비교적 운이 좋은 편이어서 나의 재능이 뭔지 좋아하는 게 뭔지 고민도 없이 대학과 진로를 결정하지는 않았지만, 라떼는 대한민국의 대부분의 수험생들이 성적 맞춰 좋은 학교 가기 급급했던 때였고(최소한 나의 주변은 그랬다) 안정적인 직장이 최고여서 공무원이나 교사를 최고의 미덕으로 여기던 때였다. 부모님의 기대와 다르게 살아가는 나는 '최고의 미덕'과는 거리가 아주 멀었다. 그래도 고집부려 하고 싶은 일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면서도 사회적 분위기를 아예 무시하고 살 수 있는 깡다구는 또 없었다. 여길 가도 저길 가도,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안 되는 그냥 그런 애였다. 소위 사회에서 '바람직'하다고 여겨지는 루트에서 벗어나는 건 꿈도 못 꾸고 조금만 늦어지는 것도 못 견뎌했다. 누가 등 떠민 것도 아닌데 내가 선택한 삶을 살면서도 패배한 것 같은 기분. 그 모든 찝찝한 마음과 사회적 역할과 가면을 벗어던지고, 오랜 시간 나에게 들려오던 길의 부름에 응답하여 까미노에 서있다. 그러면 자의로 타의로 몰아붙이던 나는 가고 없는듯 했어야 했으나, 갑자기 승낙된 자유에 당황스러워 무슨 기분을 느껴야 하는지도 모르고 어리둥절하기 바빴다. 요 며칠 정신없이 걷고 배는 자주 고프고 추웠다 더웠다 하고 다리는 아팠다.
내가 이곳에 온건 벌거벗은 나를 만나기 위해서다. 어떻게든 사회에 소속되고 싶고 이바지하는 일원이 되고 싶어 애써오던 것을 멈출 시간. 어쩐지 내일 아침은 조금 다르게 맞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정신없이 걷지 않아도 된다. 어쩌면 은경과 헤어져 걸어야 할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은경은 나보다 잘 걷고 체력도 좋으니 각자의 속도에 맞게 걷는 게 좋을지 모른다.
까마득한 내리막이 시작됐다. 올라온 만큼 긴 내리막길을 나는 조금 가벼워진 마음만큼만 조심히 걸었으면 좋으련만, 몸은 찰나의 깨달음이 꽤 즐거웠는지 탱탱볼처럼 탱탱거렸다.. 10kg짜리 가방을 메고 탱탱볼이라니... 절대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내리막을 다 내려오자 몸에 이상이 생긴 게 느껴졌다. 오른쪽 무릎이 너무 아팠다. '이 바보.. 왜 까부니..' 겨우겨우 알베르게에 도착하고 나서야 한숨 돌렸다. 밥 해 먹을 기운도 없었는데, 같은 알베르게에서 또 만난 현이 해준 닭칼국수를 맛있게, 정말 맛있게 먹었다. 순례자들이 많이 다치는 구간이라는 안내문이 뒤늦게 기억났다. 이제야 기억나면 뭐 하니 이것아...
나의 안부 문자에 남자친구는 연락을 기다리고 있었다며 답을 보내왔다. '먼저 연락하면 되는 거 아닌가?' 다짜고짜 심퉁이 난다. 그는 여사친이 많다. 내가 질투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평소처럼 일상을 살면서 내 연락에 의무적으로 답하고 있는 건 아닐까. 내가 사랑받고 있는 건지 질문이 나아간다. 일 년 여의 시간 동안 내게 몇 번을 헤어지자 통보한 일이 떠오른다. 아무리 해어지자고 해도 나는 놓지 않을 거라는 어리석은 믿음에서 오는 사랑 투정이었던걸 알았던 걸까, 나는 매번 너무 쉽게 붙잡혀줬다. 문제상황 앞에서 자신의 무기력과 우울을 빙자한 회피였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그간의 노력이 허망하게 느껴졌다. 힘들 때마다 가장 먼저 나를 버리는 사람, 그런데 난 내가 그의 구원자라도 되는 듯 매번 손을 내밀었다니. 사랑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 거라고 믿었다. 그런 나의 '대단한'사랑이 그를 지켜줄 거라 생각하면서. 그런데 이렇게 며칠 만에, 새로운 세상 앞에 놓인 나는, 그렇게 애써 지켜온 사랑(이라 부르기 민망한것)을 이미 지난 사랑처럼 여기기 시작한 것이다.
어려운 상황이 닥쳐올 때마다 나를 포기하는 사람에게 계속 함께하자고 요청하는 나, 나는 왜 그를 포기하지 않았(못했)는가. 드문드문 주고받는 싱거운 연락마저 가느다래지자 내가 더 이상 연락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나'의 무한한 가능성이 더 중요해진 순간이었다. 이번엔 내가 그만둘 차례야. 우리의 물리적 거리만큼이나 마음의 거리감이 바다만큼 생겨났다. 혼자가 되는 건 너무나 싫지만 더 이상 나를 무한정 바치기 싫다는 진실의 힘이 더 셌다. 내가 그를 놓지 못한 이유는 뭘까. 그런 힘없고 멋없는 사랑이라도 괜찮으니 구태여 사랑받고 싶었던 걸까. 나는 내게 물으며 혼자 있기 싫은 외로운 마음이 선택해 온 순간들을 마주했다.
나의 힘 있는 척했던 사랑도 내리막으로 내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