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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Feb 28. 2023

헤어지고 만나고 익숙해지고

수비리까지의 여정



밤 사이 눈이 더 내렸나 보다. 눈 내려앉은 나무 사잇길이 오늘의 첫 코스. 마치 옷장 문을 열고 나니아 연대기 이야기 속으로 들어온 것 같았다. 아침이라 아직 쌀쌀하나 눈이 주는 포근한 기운을 느끼며 시작하는 둘째 날, 스타트!



루미짱은 아침 일찍 걷고 싶다며 먼저 길을 떠났는데 뜻밖의 새로운 동행이 생겼다. 한국에서 온 은경. 한국말로 막힘없이 이야기를 주고받으니 모국어 자체가 주는 안정감이 있다. 순례길에서 만난 사람들과는 국적이 달라도 힘든 여정을 같이 겪고 있다는 동질감이 드는 탓인지 말하지 않아도 통하는 부분이 있어 언어의 장벽이 그다지 높게 느껴지지 않지만 그럼에도 낯선 풍경, 낯선 환경에서 모국어만이 줄 수 있는 편안함이란, 마치 어떤 보호막과도 같다. 안전하다는 느낌이 드는 모국어 발화로 거뜬해진 발걸음!


은경은 이미 혼자 여행한 경험이 풍부하다.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유럽까지 건너갔고 물가 비싼 아이슬란드에서는 차박으로 며칠을 버틴 씩씩한 친구다. 여행 얘기를 듣고 있자니 새삼 은경이 대단해 보인다. 예기치 않은 변수도 많이 생기고 뜻밖의 만남과 예고한 헤어짐도 잦은 여행길에서 은경은 이미 단단함을 한 줌 가지고 온 것 같다. 욱신거리는 무릎을 달래며 걸어야 하는 나의 보폭에 맞춰주느라 일부러 걸음을 늦춰주기도 했다. 그러면 나도 미안한 마음에 조금 더 속도를 내고, 그 어딘가 중간지점쯤에서 만나면 계속 걸었다.




숲길을 지나 마을로 들어서자마자 커다란 개 무리가 보였다. 혹시 어제 만난 수호자가 아닐까? 반가운 마음에 다가가보려는데 덩치가 꽤 크다. 늑대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이제껏 길에서 보았던 떠돌이견은 대부분 사람을 경계해서 멀리 도망가곤 했는데 얘네는 경계심도 흥미도 없어 보인다. 사람은 나를 헤치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았다. 그저 처음 보는 친구들이 지나가네~ 그러거나 말거나~ 태평하게 킁킁거리며 탐색하는 충실한 모습에 나도 다시 발걸음을 길로 옮긴다.


마을을 빠져나가며 말도 마주쳤다. 마치 사람 손길을 좋아해서 기다리는 것처럼 울타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다. 연달아 만나는 동물 친구들 덕분에 힘듦은 잠시 잊히고 그러면 나는 응원받는 느낌이 들어 발걸음이 씩씩해진다. 순례길에 오르고 싶으나 육체적 여건이 안되어 걸을 수 없는 사람들은 종종 말을 타고 순례를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이 말들 중 나보다 순례길을 먼저 걸어본 애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시작한 지 이틀, 이 여정이 익숙하지도 않고 마지막이 까마득하게 느껴져서 산티아고에 도착하는 날은 어떨까, 상상도 잘 안된다. 그저 오늘 숙소에 무사히 도착해서 뭐 먹지 하는 생각과 바뀌는 풍경에 신기해하며 걷기 또 걷기.


어느새 눈 내린 흔적도 없는 마을에 다다랐다. 고지에서 많이 내려온 모양이다. 온도도 나긋나긋해져 볕이 잘 드는 벤치에 앉아 쉬고 있는데 고양이들이 야옹야옹하며 아는 척을 한다. 다리에 살도 부비고 앉아서 꼬리를 살랑거리는 애교냥이들. 여기 와서 만난 동물들은 왜 이렇게 다들 친근한 거야. 또 귀여운 거 그냥 지나칠 수 없어서 한참 눈 맞추고 아기랑 놀듯이 놀았다.




부지런히 걸어 점심때가 조금 지나 수비리 숙소에 도착했다. 짐을 풀고 좀 쉬니 금방 저녁시간이 되었고, 오늘은 은경과 저녁을 해 먹기로 했다. 메뉴델디아(순례자를 위한 메뉴)를 제공하는 숙소도 있지만 그렇지 않은 숙소도 있고 또 매번 메뉴델디아를 사먹다가는 여비가 금방 부족해질 것이라 여건이 된다면 해 먹는 편이 낫다. 첫 요리를 할 생각에 수줍게 식당에 들어서는데 한 외국인 아저씨가 우리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쩌고 저쩌고.. 우리가 "노 아블라 에스파뇰(스페인어 할 줄 몰라요)"라고 해도 꿋꿋하게 계속 스페인어로 말하는 모습에 벙쪘는데 어느새 우리도 번역기를 켜고 스페인어로 설명하려고 애쓰고 있었다. 마성의 남자임이 틀림없다..


본인을 '마누엘'이라 소개하고, 대뜸 자기가 일하는 회사까지 열정을 다해 알려주며 알아들을 리 없는 스페인어를 쏟아낸다. 말은 통하지 않는데 우리는 서로 각자의 언어로 대화하는 희한한 지경에 이르렀고 한껏 기분이 좋은 마누엘은 우리에게 식사를 대접해 주겠단다. 특별할 것 없는 스파게티 맛이었지만 우리는 엄지를 들어 올리면서 "비엔, 비엔!"을 외쳤고 흐뭇해하는 마누엘과 그렇게 친구가 됐다.



마누엘이 만들어준 요리


휴 오늘도 무사히 걸었다. 또 길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났다. 먼저 떠난 동행은 어디쯤 갔을까 궁금해하고 새로운 만남에 즐거워했다. 내일은 정말 기대되는 날이다! 왜냐하면 내일은 순례길의 첫 대도시, 팜플로나에 들어가는 날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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