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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Feb 01. 2023

힘들다고 정신줄 놓으면 안되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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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혼진데스까?

"노, 아임 코리안"



  수줍게 말을 건넨 사람은 웬 동양인 여자였다. 말투에서 옹골차고 다정한 기운이 느껴진다. 편안해 보이는 옷차림에 순례자가 아닐까 했는데 역시나 순례자라고 자기를 소개한다. 순례길은 처음인데 혼자 걷기가 조금 무섭다면서 내가 괜찮다면 며칠 같이 가고 싶다고 했다. 파리에서 바욘까지 오는 동안 혼자이고 싶지만 혼자이기 싫은 양가감정이었는데 낯선 곳에서 이웃나라 친구를 만나니 반가운 마음이 앞선다. 흔쾌히 알겠다고 하자 긴장한 빛이 남아있던 얼굴이 마침내 환해진다. 그렇게 순례길의 첫 동행이 생겼다. 일본에서 온 루미짱!


  일 년 간의 워홀을 마치고 일본으로 돌아가기 전에 순례길에 오른 루미짱은 다양한 국적의 친구 사귀는 것을 즐겼고 모험심도 많아보였다. 지금 하는 모든 경험이 다 소중하다고 숨김없이 표현하는 루미짱의 에너지에 이끌려 시간가는 줄 모르고 한참을 신나게 얘기하다보니 하루가 훌쩍이다. 마을 산책도 하고 큰 마트 구경도 하며 새로운 풍경과 흥미로운 수다로 꽉 채워져 저물었다. 드디어, 내일 출발이다!







  서늘한 새벽 공기를 마시며 출발했는데 해가 금방 떠오른다. 와 아침이 이렇게 좋은거였나.. 대중교통만 타고 다녀서 알아채지 못했나보다. 내가 아는 아침의 생기는 바쁘게 출근하는 사람들이거나 카페에서 쉼없이 들리는 원두갈리는 소리, 이런거였는데 자연의 생기는 완연히 다르다. 아침의 부름에 답하듯 깨어나는 땅을 맞이하며 너무나 신이났다.


  첫날의 설렘 탓인지 아니면 평온한 아침기운 탓인지 흥분한 마음을 감추지 못하며 연신 "so happy" "peaceful~" 을 주고받으며 생장을 빠져나왔다. 길가다 만난 벚꽃마저 신비로워 보이는 첫날의 매직. 문득 지나온 첫마음들이 스쳐간다. 두근두근 떨리던 첫 출근날, 고백받고 처음 손잡던 날, 전학간 학교에 처음 등교하던 날, 순수하고 열렬했던 첫사랑. 두근거리는 마음은 비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 시작은 앞으로의 여정이 막연한 탓에 두려움도 있으나 큰 설렘으로 점철된다. 마치 아직 찬바람에도 기어코 꽃을 피워낸 벚꽃의 모양처럼. 저쪽 나폴레옹루트로 론세스바예스에 가는 길은 아직 눈으로 가득하다는데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이 길에는 어째서 온몸으로 꽃을 피워낸 나무가 있는지. 앞으로 한달이 넘는 순례길 여정의 끝은 아스라한채 순전한 기대로 가득차오르는 시작이었다. 



 

  히히덕거리는 와중에도 노란 화살표를 잃지 않으려 애쓰며 걷다 보니 걷다보니 어느새 스페인 국경도 넘었다. 이제부터 우리의 인사는 "¡HOLA!"다. 조용히 연습해본다. '올라!' 발음부터도 경쾌하고 산뜻한 인사. 눈이 마주치는 사람마다 올라! 하고 말을 건네면 또 올라! 하고 반사적으로 인사를 주고 받았다. 어느덧 산길로 들어서 한참 걷고 있는데 느닷없이 강아지 한 마리가 뒤따라 오더니 앞서가기 시작했다. 마치 자기만 따라오라는 듯 의기양양하게 걷다가 거리가 멀어지면 뒤도 돌아보고 그 자리에서 기다리고 있다. 쉬었다 가려고 잠깐 가방을 내리면 저만치 앞서가다가도 우리가 있는 쪽으로 되돌아와 앞에 꼼짝없이 앉아있는 것이 신기하고 영험(?)하기까지 하다.



혹시 이 강아지 보신 분..?



  복슬거리는 털은 언제 다듬었는지 눈을 덮었고 원래 흰털인것 같은 몸은 흙투성이다. 얼마나 이러고 다닌걸까? 혹시 배가고플까 해서 빵 한조각을 나눠줘도 별 관심이 없다는 듯 킁킁거리고만다. 루미랑 이 개의 정체에 대해 한참 상상의 나래를 펼졌는데 어쨌든 NF력 가득한 둘은 우리가 길을 안전하게 걷길 바라는 어떤 신성한 안내자로 여기기로 했다. 길을 알려주는 것 말고 다른건 바라는게 없어보이는 안내자를 따라 걸으며 론세스바예스까지 1/3 쯤 남겨둔 상태였다. 우리는 혹시 길을 잘못들까봐 지도를 보고 큰길 가까이 걷기로 했는데, 안내자는 쭉 외길로 가길래 내심 아쉬워하며 잘가라는 인사를 건넸다. 한 10분쯤 걸었을까? 낙엽 바스라지는 소리가 들리더니 우리 앞에 다시 뿅! 하고 나타난 안내자. 그렇게 다시 만나 한 30분쯤 같이 걸었을까. 완전히 큰 길이 나오고 나서는 더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고마웠어..! 덕분에 첫날을 신나게 걸었다. 그리고 이 길을 무사히 마칠수 있을 거라는 막연한 믿음 또한 생겼다. 나를 지켜주고 응원하는 존재가 분명히 있다고 철썩같이 믿는 믿음.







초입에 있는 교회


 "우와! 눈이다!"


  분명 꽃핀 나무를 보고 출발했는데 눈이라니! 감정표현에 거침없는 루미짱은 눈에 발라당 눕고 눈을 먹기까지한다. 진심으로 신나보였다. 루미짱의 눈쇼 덕분에 춥고 지루한 길을 깔깔 신나게 걷다보니 언덕 너머로 큰 건물 하나가 보인다. 론세스바예스에 하나밖에 없는 공립 알베르게! 우와 하루에 22km를 걷다니.. 힘들면 중간에 있는 발카를로스에서 멈추려고 했는데 첫날 이렇게까지 걸을 수 있을줄 몰랐다. 새삼 같이 걷는 즐거운 힘에 감탄하며 데스크에서 기다리고 있자니 간간히 한국말도 들렸다. 1시간여를 춥게 걸어와서 그런지 아니면 오래간만에 모국어를 들은 탓인지 한순간에 긴장이 풀리고 피로가 몰려왔다.


여기서 누워있으면 감기걸려 루미짱!



  일단 무거운 몸을 질질 끌고 침대를 배정받고 알베르게에서 주는 시트를 깐다. 베드버그가 있을까봐 챙겨온 스프레이도 칙칙 뿌려주고 침낭까지 셋팅하고나면 피로를 씻어내러 샤워타임! 보통 샤워실은 공용인 경우도 있고 남녀 따로 있는 경우도 있는데 (그래도 칸막이는 거의 있음) 피곤이 너무 급하게 몰려와 비몽사몽중에 가까운 샤워실로 갔다. 칸막이가 안전하게 나뉘어 있는 널찍한 공간이었다. 아무도 없어서 내가 씻는 소리만 천장에 부딪혀 돌아왔다. 중간에 누가 들어오는 소리도 들렸다. 루미짱인가보네. 굵고 낮은 기침소리가 컹컹 울렸다. 루미짱 눈에 철퍼덕 눕더니 감기걸렸나보네.. 너무 피곤해서 거의 잠결에 씻은듯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몰랐다. 내가 들어간 곳이 어딘지..


  샤워를 끝내고 돌아오자 건너편에 한국인 여자가 짐을 풀고 있다. 역시나 엄청 피곤해보인다. 샤워실을 묻기에 저쪽이라고 알려줬는데 씻고 돌아와 말하기를 글쎄 "거기 남자샤워실인데요?" 하는게 아닌가..


  너무 놀라서 내가 씻었던 곳으로가보니 그제서야 보이는 남자 샤워실 표시.. 여자 샤워실 입구는 반대쪽이었다. 그때서야 샤워하면서 들었던 굵고 낮은 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으악.. 마주치지 않았으니 망정이지 마주쳤으면 진짜 너무너무 너. 무. 민망할 뻔 했다. 이날의 에피소드는 같이 묵었던 친구들 사이에서 깔깔소재로 등극했고 좌우지간 끝날 때까지 정신줄 놓지 말자는 말을 마음에 꾹꾹 새겨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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