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겨우내 Feb 16. 2024

너를 위한 인생을 살아

아빠로부터

  

  맛있다고 와인을 홀짝홀짝 마신 탓일까, 아침부터 컨디션이 좋지 않다. 흐린 눈으로 길을 나서도 조금만 걷다보면 싱그러운 아침 기운에 정신도 맑아지던데 오늘은 30분째 걸어도 머리가 무겁고 몸이 으슬으슬하다. 아무래도 감기가 온 것 같았다. 그래도 오늘 가야할 길이 있으므로 일단은 걷기로 한다. 따뜻한 볕이 오르면 좀 나아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으로 버텨보기로 했다.



  대도시 로그로뇨를 벗어나면 한참을 또 조용한 시골길을 따라 걷게 될 것이다. 로그로뇨로부터 약 100km쯤 걸어야 또 대도시가 나온다. 내 걸음으로는 아마 5일 후에야 도착하지 않을까. 도시가 주었던 잠깐의 짜릿함과 즐거움을 뒤로하고 로그로뇨와 작별을 고했다.



   도심을 벗어나 한적한 공원으로 들어섰는데, 숲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났다. 갑자기 나무 사이로 작고 귀여운 다람쥐가 나타났다. 여기서 다람쥐를 만난 건 처음이라 신기해 걸음을 멈췄는데, 산책하던 동네 아저씨는 이미 익숙한 풍경인듯 미리 챙겨온 견과류를 주머니에서 꺼내어 건넸다. 귀여운 다람쥐는 조금 경계하는듯 한발짝 한발짝 조심스럽게 다가오더니 견과류를 받아들고 쪼르르 숲 쪽으로 돌아간다. 오독오독 소리를 내는 모습이 꽤 시선을 끌었다. 작은 손으로 잡고 빙글빙글 돌려서 견과류를 다 먹더니 또 없나 눈치를 보고 있다. 사람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다람쥐라니... 생소한 풍경에 한참 구경을 했는데 아뿔싸, 그 사이 찬바람이 몸에 구석구석 닿으며 몸살기운이 싸악 퍼졌다.




  보통은 9키로를 더 걸어 나헤라까지 가곤 하지만 무리하지 않고 벤토사까지만 걷기로 했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이 지나쳐가는 조용한 동네였다. 가게도 일찍 문을 닫고 숙소에도 우리 둘뿐이었다. 열이 오르고 오한이 나서 몸이 오들오들 떨렸다. 불행중 다행으로 알베르게 주인이 진통제를 하나 건네주었다. 무척이나 긴 밤이었다.






  아침에 일어났는데도 몸이 좋지 않았다. 도저히 걸을 컨디션이 아니여서 하루 더 쉬어갈수 있는지 물었지만 하루밖에 잘 수 없단다. 순례자는 무조건 길을 떠나는게 원칙이라며 시간 맞춰 방을 비워달라고 했다. 몸이 아픈데 그런 원칙이 다 뭔가 싶고 서러웠지만 어쨌든 이곳의 규칙이니 길을 나섰다.


  걷고 있는 우리 뒤로 어김없이 해는 떠올랐고 우리는 우리의 그림자를 보며 걸었다. 가방은 돌덩이를 멘 듯 너무 무거웠고 몸에 기운이 하나도 없었다. 나는 겨우 겨우 한 걸음씩 떼면서 오늘은 오래 걸을 수 없을 것 같다고 했다. 은경에게 의사를 묻자 계속 길을 걷고 싶단다. 길에서 만났으니 길에서 헤어지는게 당연지사지만 여느 헤어짐과는 달리 내게 묵직하게 다가왔다. 순례길에서 만나 하루만 같이 걸어도 전우애 비스무리한게 생기는데 일주일이나 함께 걸었으니, 헤어짐이 아쉽게 다가온다. 우리는 나헤라에 도착하자 마자 바에 들러 간단히 아침을 먹었다. 그리고 은경은 '산티아고에서 만나자'는 말을 남기고 오늘의 목적지로 다시 걸음을 옮겼다. 그렇게 함께 걸어온 나의 두번째 동행, 은경과는 나헤라에서 헤어졌다. 부지런히 걸어서 다시 만나자는 힘있는 약속을 하고.



  나는 여정 처음으로 호스텔에서 쉬어가기로했다. 어제 뭘 잘못먹었는지 화장실에서 위아래로 한참을 비워냈다. 혼자 쉴 수 있는 숙소 잡기를 잘했다 싶었다. 모두 자는 밤에 화장실에 자주 들락거리는건 여간 눈치 보이는 일이 아니다. 코고는 소리에도 해방이고, 무엇보다 발가벗고 있어도 된다! 배려가 필수인 알베르게를 떠나 나홀로 발가벗고 해방감을 느끼고 있으니 혼자인게 더욱 실감 났다. 병원을 갈까 하다가 지난 번 진료비 폭탄 맞았던게 생각나자 이만큼 아픈건 참을만 하다고 느껴졌다. 근처 약국에서 약만 타다 먹고 포근한 이불에서 한잠 푹 잤다. 


  얼마나 지났을까, 은경이 잘 가고있는지 궁금해 연락을 남기려 카톡을 뒤졌다. 은경의 카톡 배경은 여전히 아빠의 메시지를 캡쳐해 놓은 화면이다. 두 세번을 곱씹어 읽는데 목에 묵직한 것이 걸린 듯 울컥하고 말았다.


 '은경이가 정말 하고픈일. 누구 때문에 하는 일은 행복이 아니야. 너를 위한 인생이 되게 살아라. 그래야 후회하지 않는다. 아빠는 언제나 네편이야. 많은 것을 해줄 수는 없지만 항상 너를 믿고 은경이가 하는 일을 응원할거야.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사람으로 살아.'


  씩씩하게 다시 홀로 길을 나선 은경, 나는 그 단단함이 종종 시샘이 날만큼 부러웠다. 부모의 믿음, 애정어린 말, 그 말을 마음으로 아로새긴 은경은 내게 자꾸 질문을 던지는 존재였다. 나는 나를 위한 인생을 살아왔는가? 내가 정말 하고 싶은 일은 무엇이지?... 은경과 나, 모두 길 위에서 이 질문을 마주하고 있을 터였다. 함께 걷는 즐거움에 멀어져 있던 질문들이 곧 닥쳐 올 것이다. 나를 위한 인생이란 뭘까? 분명 나'만' 생각하는 인생은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사회 통념이나 부모의 바람에 맞춰 나를 지워버리는 인생은 더더욱 아닐 것이다. 이 길 끝에 나는 어떤 감정을 마주할까, 질문에 대한 답에 가까이 다가갈 수 있을까, 궁금해졌다. 은경은 한참 걸어 이제야 숙소에 도착한 모양이었다. 서로의 안녕을 빌어주고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서로 연락을 남기기로 했다.


  혼자가 된 와중에 아프기까지 하니 어김없이 한국에 있는 가족들 생각이 난다. 아직 가야할 길은 멀었고, 다리는 이제 좀 나았나 싶은데 장염인가 뭔가에 걸려버렸고, 먹는 것도 잘 못챙겨 먹고 있었지만, 아프다는 말은 쏙 빼고 잘 지내고 있다는 말만 전했다. 혼자 있으면서 해야 할 일은 얼추 다 한 것 같다. 푹 쉬기, 가족들에게 찐하게 안부 전하기, 빨래, 먹는건 어려울 것 같으니 또 쉬기...


  그 때, 페이스북 메시지가 울렸다.


  "So, Where are you now?"


  지난번 에스테야에서 만난 알렉스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3줄 정리

- 장염인가 뭔가에 걸려버렸다.

- 은경과 헤어졌다.

- 쉼이 필요할 땐 알베르게에서 벗어나 숙소를 잡자~


작가의 이전글 진정한 순례자는!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