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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 Mar 13. 2024

순례자의 숙to the명

냅다 걷는거죠 뭐 | 부르고스까지 24km

  꿈자리가 안좋은 날이면 엄마는 꼭 전화로 나의 안부를 물었다. 무슨 경고라도 받은 것처럼 걱정스러운 말로 조심하라고 했다. 그런 날엔 괜히 몸을 사렸던 기억이 난다. 꿈은 꿈일뿐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언젠가 꿈에서 본 장면이 문득 현실에서 재생될 때나, 꿈에서 깼을 때 찝찝한 기분은 더더욱 내 마음에 닫힌 문을 열어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고 생각해서다. 간 밤의 꿈은 나에게 어떤 경고처럼 느껴졌다. 


  생생했던 꿈의 여운이 길어 손은 바쁘게 가방을 꾸리고 있으면서 머리로는 꿈을 다시 재생하느라 바빴다. 김치 왕창 먹고싶다... 젓가락에 라면 돌돌 말아서 쏙... 김치 아깝게 그걸 왜 눈에 비볐지... 왜 걔는 꿈에 라면을 들고 나타났지... 이런 꿈을 꿨을까. 꼬리에 꼬리를 무는 상상으로 바쁜 와중에도 몸은 저절로 움직여 출발 준비를 마쳤다. 꿈이야 어찌됐든 아침은 밝았고 오늘도 걸어야 하는게 순례자의 숙 to the 명.


  어제도 20km 넘게 걸었는데 이틀 연속 무리하지 않으려고 가방은 부르고스의 알베르게로 보냈고 스틱과 귀중품만 챙겼다. 동민이 준 무릎보호대도 오른쪽 무릎에 꽁꽁 두른다. 동민은 무릎 보호대를 더 꽉 조이게 고쳐 매주더니 "Vamos!"라고 한다. 오늘도 여전히 익살스럽다.



  오늘은 순례 여정 중 거쳐갈 도시 중 가장 큰 부르고스에 입성한다. 대도시로 향하는 날 아침은 마치 놀이동산 가는 날처럼 설레서 발걸음이 통통 거린다. 가방을 보낸 덕분에 속도가 빠른 동민과 맞춰 걸을 만큼 몸이 가벼웠지만 일부러 거리를 두고 걸었다. 괜히 꿈 탓을 하면서 어제 내내 끓어올랐던 나의 속내는 감춘 채 헤헤 웃어보이기만 했다. 이 길에서 만큼은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었지만 그러지 않아야 할 것 같은 마음이 더 셌다. 나는 혼자서도 잘 지내고 싶은데... 의지하고 싶은 인연과 계속 마주치고 있는 상황도 이상했다. 나는 사실 혼자 걷고 싶지 않은걸까? 정말 혼자 걷고 싶은거라면 어떻게 이 마음을 끊어낼 수 있을까? ... 내 마음이 제일 이상하고 어렵다. 


   사실 매일이 그랬다. 그래서 네가 원하는건 뭐니?라는 묵직한 질문을 갖고 길을 오른데 앞서 오늘은 어디까지 걷지? 오늘 길에 오르막 구간은 없는가? 중간에 쉬어갈 마을이 있었으면 좋겠다. 거기서 콜라 한 잔을 하면 좋을텐데. 저녁은 뭘 먹지? 오늘은 알베르게에서 또 어떤 인연을 만날까?하는 하루살이 생각만 하기에도 바빴다. 하루를 정리하면서는 그저 오늘 하루를 무사히 걷고 쉴 수 있음에 안도했고 감사했다.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싶었는지, 왜 길에 올랐는지는 희미하게나마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저 하루 걷고 먹고 자는 이 단순한 리듬의 반복 덕분에 벌써 300km 가까운 길을 걸었다는 점에서 꾸준하게 '그냥 하는 힘'의 중요성을 느낀다. 


  길에서 만난 인연은 변주와 같다. 그것도 동민은 꽤 높은 음에 속한 음을 내면서 안그래도 박치인 나의 리듬을 세차게 흔들고 있었다. 나는 나의 리듬을 놓치지 않으려 애쓰다가도 그저 흔들리고 싶은 마음에 사로잡혔다가도 흘러가는대로 흐름에 맡겨보자 한다. 그때 내게 가장 필요한 선택을 할 것이라 믿자. ... 


 

  이제 부르고스에 이르렀다는 표지판을 보고서도 30분 넘게 걸어서야 오늘의 알베르게에가 있는 중심부에 도착했다. 도시는 부활절을 앞두고 몰려온 현지인들과 관광객, 순례자들로 들썩들썩했다. 도시의 활기에 아침에 들었던 기분은 까무룩해지고, 대성당을 품은 도시를 둘러볼 생각에 설렌다. 손바닥 뒤집듯 하루에도 몇 번씩 팔랑거리는 마음이 우습다. (현재에 충실하다고 하자.)


   그런데 알베르게로 미리 보낸 짐이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미 도착해있어야 하는데, 가방은 어디로 간 것일까. 알베르게와 동키서비스에 이리저리 연락을 해보니 가방이 다른 알베르게에 도착해 있었다. 그래도 다른 도시로 배송되지 않은게 다행이었다. 길에서 전재산을 잃어버리는 줄 알고 깜짝 놀랐다. (그래봤자 옷가지, 침낭이라지만) 식은땀이 죽 흘렀던 해프닝도 마무리하고 저녁을 먹을 겸, 동민과 시내로 향했다.



  부르고스는 옛 카스티야 왕국의 수도이자, 무려 3세기에 걸쳐 지은 대성당으로 유명한 도시다. 프랑스 길에서 출발해 산티아고로 향하는 순례자들이라면 대부분 거쳐가며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서 순례를 재정비하고자 쉬어가는 사람들도 많다. 부르고스 대성당만을 보러 오는 여행객들도 있어서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는 도시. 


  무엇보다 대성당은 어떤 걱정도 잊혀질 만큼 아름다웠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에 등록된 대성당은 한눈에 보기에도 압도적인 크기여서 '와'소리가 절로 나온다. 길에서 마주한 대자연 앞에서 내가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를 실감했다면, 이 성당 앞에선 신을 사랑하는 마음과 아름다움을 갈망하는 인간의 창조 능력이 만들어낸 결과물에 넋을 잃었다. 웅장한 크기와 아름다움에 두 손이 절로 모아진다.



  주께서는 나의 앉고 서는 것을 아시며 나의 생각을 멀리서도 아시나이다. 주께서는 나의 길과 나의 눕는 것을 샅샅이 아시며, 나의 모든 길들을 익히 아시나이다. (시편139:2-4)


  그래서 신은 정말 나의 고민과 갈등을 다 알까? 문득 떠오른 이 성경 구절 앞에서 잠시 잠잠해진다. 신이 나를 속속들이 '안다'는 말에 벌거벗은 듯 부끄럽다. 그러나 신의 '앎'이 사랑을 전제로 한 앎임을 느끼며 위로 또한 받는다. 무엇이 옳고 그른지, 누구의 잘잘못인지 따지는 것은 시공간을 뛰어넘은 앎 앞에서 큰 의미가 없다. 존재가 나를 안다. 속속들이 보이는 것 너머를 안다. 그것도 완전하게. 진실한 앎이 주는 자유로움이 바로 손에 잡힐듯 했다. 내 인생을 잘 살아보고자 하는 모든 선택들 중 '잘' 한 선택은 무엇이고 그렇지 않은 선택은 무엇인가. 그로부터 배웠다면 잘 한 일과 잘못한 일의 경계를 그을 수 있을까?


  만일 내가 말하기를 "실로 어두움이 나를 덮고, 밤이 나를 두른 빛이 되리라." 할지라도 정녕, 어두움이 주로부터 숨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빛나리니, 어두움과 빛이 주께는 똑같나이다. (시편139:11,12)



  도시는 마침 고난주간을 맞이하는 현지인들의 행렬과 구경하는 인파로 발디딜 틈 없이 복잡했다. 동민과 나는 저녁을 해치우듯 먹고 인파에서 빠져나왔다. 그리고 사람이 드문 도시 외곽 언덕에 올랐다. 동민은 생각에 잠긴듯 말을 아꼈다. 말많던 사람이 갑자기 진지해지니까 어쩔 줄 모르겠는 나는 나의 리듬으로 갈까, 아니면 변주곡에 발이나 굴러볼까 망설이면서 그렇지 않은 척 물끄러미 해나 바라봤다.




3줄 정리

- 산 후안 데 오르테가에서 부르고스까지 24km

- 짐을 잃어버린 줄 알았다

- 함께 걸을까? 혼자 걸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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