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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15. 2024

기대감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싶어

내가 정말 원하는 삶은

산티아고 가는 길은 약 800km의 긴 여정으로 세 개의 구간으로 나뉜다. 첫 번째는 생장에서 부르고스까지 '몸의 길'이라고 불리는 구간이다. 길을 걷기 시작하며 몸이 적응하고, 익숙해지기까지 부상도 잦다. 나에게 맞는 보폭, 가방 메는 방법, 걷는 거리를 이 구간에 잘 파악해 두면 좋다. 두 번째는 '마음의 길'로 부르고스부터 레온에 이른다. 지평선이 보이는 메세타 구간을 걸으며 순례자들은 육체의 고통을 너머 자신이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마지막 '영혼의 길'은 레온부터 순례자들의 목적지인 산티아고로 닿는다. 육체의 고통과 마음의 걱정들을 뒤로하고 영혼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되는 마지막 여정으로 마지막 여정을 마무리하며 산티아고 대성당에 이르게 된다.


이제 몸의 길 구간이 끝나고 마음의 길에 접어든다. 무릎은 여전히 아팠으나 살살 달래며 걷는 방법을 배웠다. 이제껏 무릎 부상과 장염으로 몸이 고생을 많이 했는데 이제 몸도 적응을 한 듯했다. 부르고스에서 레온까지는 약 180km쯤 되며 끝없이 펼쳐지는 메세타 평원을 걸어야 한다. '마음의 길'이라는 별칭이 무색하게도 순례자들에게는 마의 구간이라고 불렸다. 그늘도 없는 자갈길을 꽤 걸어야 하니 그렇게 불릴 만도 하다. 순례 커뮤니티에서는 혹시 시간이 부족해서 스킵하고 싶거든 꽤 지루하고 힘든 이 구간을 지나가라는 조언도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었다. 


소중한 이정표, 지도 없이도 노란 화살표만 따라가면 된다. 


부르고스에서 출발하는 아침, 그리 어렵지 않게 노란 화살표를 다시 찾을 수 있었다. 끝도 없이 고독하고 외롭다는 마음의 길 서막이 열렸다. 아니나 다를까, 해가 제법 오르기 시작하니 평소보다 얼굴이 더 뜨겁고 정수리까지 해가 오르자 체력 소모는 더 심해졌다. 정말 그늘이 하나 없었다. 가방 없이 하루를 걸어서 그런가 어쩐지 무게도 더 나가는 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도 든다. 저 언덕 너머에는 쉬어갈 마을이 있겠지? 하고 고개를 오르내리고, 마을 대신 또 다른 고개가 나오길 수차례, 그렇게 속고 속기를 몇 번 반복하니 20km를 금방 걸은 것 같다. 누가 메세타를 지루하다고 했나. 이렇게 애간장을 태우는 길인데.


동민과는 더더욱 속도차이가 나기 시작했다. 이제 본인의 페이스를 찾기로 결심한 듯 동민은 마구 앞서 걸었다. 갑자기 저만치 걸어가 버려서 이렇게 인사도 없이 헤어지는 건가 싶으면 동민은 마을에 있는 바에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예의일까, 다른 속셈일까? 길에서 만났으니 길에서 헤어지는 건 당연한 건데 동민은 왜 제 페이스로 걷지 않을까? 기다려준 동민에게 고맙다고 하기는커녕 배알이 꼴린 듯 불편한 마음만 들었다. 여러모로 챙겨준 동민인데... 미안한 마음이 점점 커진 탓이다.


그래서 다음 날, 나는 먼저 일찍 길을 나섰다. 나는 걸음이 느리고 동민은 걸음이 빠르니 먼저 걷기 시작하면 동민이 날 기다리지 않아도 될 터였다. 어쩌면 이렇게 길이 엇갈릴지도 몰랐지만, 계속 불편한 감정으로 길을 걷기엔 내게 주어진 이 시간이 너무 소중했다. 그건 동민에게도 마찬가지일테다.



혼자 아침을 맞이하니 풍경이 더 살갑게 느껴졌다. 순례길 하루 중 아침이 가장 좋은 것은 오늘에 대한 기대감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은 어떤 풍경을 걷게 될까? 어떤 맛있는 음식을 먹게 될까? 또 어떤 인연을 만날까 하는 기대까지. 출근길부터 퇴근만 기다리는, 한국에서 맞이하던 아침과는 확연히 다른 아침이다. 하루를 기대감으로 시작한 날이 언제였던가... 특별한 날을 기다리며 하루를 버티는 삶이 아니라, 매일의 아침을 기다리며 눈뜰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일상의 소중함이 이런 것인가. 실로 오래간만에 느껴보는 감정이었다.


무엇보다 아침에 일찍 길을 나서며 발견한 것은 해가 다 뜨지 않은 아침엔 민들레들이 하나같이 꽃잎을 닫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민들레가 벌써 시드는 계절이 되었나 했다. 그런데, 같은 날 오후에 만난 민들레는 꽃잎을 활짝 열고 해를 맞이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에도 민들레는 해가 떠올라야 피어났다. 꽃들도 쉬었다 다시 피어나기를 반복한다니, 놀라운 발견이었다. 아침 일찍부터 자연을 벗하여 걸은 적이 없었던 탓이다. 생동하는 자연과 함께하는 매일을 일상으로 살고 싶다는 마음이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동민보다 일찍 출발했지만, 금방 따라 잡혔다...(ㅋㅋㅋ) 동민이 빠르다기보단 내가 엄청 느린 것 같다. 해로 달궈진 길을 허우적거리며 걷느라 무척 지쳤지만 오늘의 목적지인 까스트로 해리스에 한인이 운영하는 알베르게가 있다고 해서 무척 반가웠다. 식사 메뉴로 라면과 비빔밥이 있다는 희소식에 기운을 내본다. 우리는 알베르게에서 만나기로 하고 각자 페이스에 맞게 걸어서 다시 만났다. 일찍 길을 나선 덕분에 일찍 도착해서 마당에 퍼질러 앉아 햇볕도 쬐고 좋아하는 노래도 들었다. 밀린 빨래도 하고 나니 어느덧 해가 질 무렵이라 어슬렁 마을 구경을 나왔다. 지는 해가 건물에 반사되어 눈이 부셨다. 얼마나 멀리서부터 온 빛일까 세어보다가 금방 눈이 침침해져 버린다.



아침 해를 맞이하고 지는 해를 보내는 일상이라니. 감격스럽다. 이미 해가 떠있거나, 해가 다 지고 나서야 퇴근하는 삶이었다. 해를 볼 여유가 없었다는 말이 더 가깝겠다. 가끔 맑은 날, 때맞춰 퇴근을 하면 건물 사이로 지는 노을 조각이나마 볼뿐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숨 쉬는 자연을 가까이하며 매일을 지내자니 생생히 살아있는 기분이다. 몸의 의식이 깨어나는 듯했다. 내가 이렇게 소박한 것을 바랐구나. 그저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고, 지는 해를 보내며 자연과 가까이하는 삶. 이런 삶을 내가 원했구나.



부르고스를 떠나 이틀, 하늘과 평야가 맞닿은 지평선을 보며 걸었다. 지루하고 힘든 구간이라는 정보와는 달리 메세타 평원은 '탁 트인', '시원한'이라는 형용사에 가까웠다. 해를 고스란히 받아야 했지만 바람도 막힘 없이 바로 불어왔다. 그래서 땀도 잘 식었다. 잠깐 팔을 벌리면 겨드랑이 사이로 시원한 바람이 지나갔다. 푸른 하늘과 싱그러운 초원 빛에 눈까지 시원해지고 말이다. 노래를 실컷 부를 수 있는 것도 작은 즐거움이다. 뻥 뚫린 하늘에다가 노래를 내 지르다 보면 지루할 틈이 없다. (물론 다른 순례자들이 있으면 부끄러워서 못함)


막상 걸어본 메세타 구간은 생각과 달리 정말 좋았다. 뭐든 내가 겪어보고 걸어보기 전에는 모른다. 사람도 그렇고 길도 그렇다. 나는 아직 동민을 잘 모른다. 우리가 언제까지 함께 걸을지는 모르겠지만, 이렇게 쭉 함께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한다고 해도 나는 동민의 반의 반도 모를 것이라고 생각했다. 우리는 각자의 출신, 학력, 직업, 가정사 같은 배경을 한국에 똑 떼놓고 길에서 만난 인연이라는 것을 인식했다. 그것이 길의 매력이라고 생각하는 한편, 불현듯 그것이 우리가 더 가까워지지 못하는 이유라는 것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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