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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 Mar 21. 2024

차라리 내가 공이었으면

굴러갈 텐데..|프로미스타까지 25km

그거 아세요? 무릎 부상자에게는 오르막길보다 내리막길이 더 까마득하다는 거.. 모스텔라레스 고개가 오늘의 고비였다. 마을 시작에서 오르막길까지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걸었다. 풍경을 눈에 가득 담고 해가 얼만큼 올랐나 살펴보는 일이 즐거움이었다. 언덕 위에 올라가면 멋진 풍경이 기다릴 것 같아 기대감을 안고 꼭대기에 도착했는데... 반대편에 까마득한 내리막길이 펼쳐져있다. 이제껏 걸었던 내리막보다도 경사가 급한 편이었다. 프로미스타까지 가려면 이 내리막길을 지나 한참 더 걸어야 했다. 차라리 내가 공이었으면.. 굴러내려가고 싶었다. 데굴데굴...



내려가기 전에 한 템포 쉬어가기로 했다. 뒤돌아서보니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해의 따스함이 점점 짙어져 오는 실로 진한 아침이었다. 광활한 평야도 해를 안고 노랗게 물들었다. 잠깐 내리막길의 아득함은 잊고 감탄에 빠져있는데 저만치에서 걸어오던 순례자들이 "부엔까미노"로 인사를 전하며 하나둘씩 먼저 내려갔다. 순례자들이 내리막을 다 내려가 성냥개비만해 보일 때쯤에서야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스틱을 꺼내 들었다. 무릎에 힘이 실리지 않도록 스틱에 무게를 실어보려는 생각이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게걸음으로 내려가게 됐는데 몇 걸음 떼보니 그것도 또 한쪽 다리에만 무게가 실려 아예 뒤를 돌아 걷기 시작했다. 뜻하지 않게 내려오기 시작한 순례자들과 얼굴을 마주 보며 걷게 됐다. 인사도 나누고 응원받기를 즐기다 보니 어느덧 완만한 평지에 다다라 있었다. 최고의 아침이었다. 아침의 싱그러움과 따스함, 다른 순례자들이 전해주는 기쁨과 즐거움이 얽혀 긍정적인 에너지가 가득 차올랐다.


거기다가 마음을 울리는 문구까지 만났다. "Follow your heart!" 마지막 느낌표마저 이제는 깨달으라는 듯 알람처럼 마음을 울려서 발이 묶인 듯 좀처럼 떠나지 못하는 한편, '네 마음을 따라가!'라는 말과 대조되는 '규칙'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다. 내 마음을 따라가는 것이 세상 쉬운 일인듯 싶으나 그러기엔 너무나 많은 규칙이 내 마음에 인박여 있었다. 이건 안돼, 저것도 안돼, 이건 잘못된 행동이잖아, 이런 삶은 너에게 어울리지 않잖아... 규칙들이 나의 안전기지가 되어준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답답하기도 했다. 별다른 규칙 없이도 안전하고 재미있게 세상을 즐기는 사람들을 보면서 내가 사회 공동체에 속하고 싶은 마음으로 지켜온 자체의 규칙들이 힘을 잃었으면 했다.



나의 호기심은 뒤로하고 날 안전하게 지켜줄 거라는 믿음으로 따라온 규칙이었으나, 나는 지금 나를 둘러싼 규칙들이 없는 환경에서 이 규칙이 그렇게 쓸모 있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물음표를 가진 채 서있었다. 사람들에게 폐를 끼치지 않는 선에서 내가 원하는 것을 선택해도 된다는, 사람들의 시선이나 규칙에 얽매어 억지로 선택하지 않아도 된다는 자유로움을 가지고 있다고 느껴본다. 술 한잔 마음 놓고 마셔보지 않았다. 음악 앞에서 리듬 타는 것조차 스스로 금기시했다. 좋은 것과 나쁜 것은 어디서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나는 스스로 보고 듣고 경험하고 선택하고 싶다. 규칙 때문이 아닌 스스로의 양심과 판단을 가지고 안전기지를 새롭게 만들고 싶다. 안정감이 매우 중요한 내게는 규칙 밖으로 벗어난다는 게 모험 그 자체이나, 하지만 순례길은 모험을 위해 떠나온 것 아닌가? 


그렇게 마음을 먹자 응어리진 덩어리가 느껴진다. 이 가여운 뭉치를 밖으로 잘 꺼내 날개를 활짝 펴게 해주고 싶다. 다시금 세상을 살아보라 하고 싶다. 새롭게 경험하는 것들을 좋다, 나쁘다 구분해 두기 전에 충분히 들여다보라 하고 싶다. 시간이 오래 걸리더라도 내 마음을 믿고 나를 믿고 다시 경험해보고 싶은, 울타리 밖의 세상이 비로소 열리고 있었다.



이번 주는 부쩍 걷는 사람이 늘었다. 드문드문 보이던 순례자들의 간격이 촘촘해졌다. 부활절을 기념하며 가족, 친구, 성당 식구.. 저마다의 이유로 짧게나마 시간을 내어 기도하며 걷는 무리들이었다. 그중 키가 무척 크고 울림통이 쩌렁쩌렁 스페인 아저씨 '도니'를 만났다. 부활절을 맞아 일주일정도 시간을 내어 가족들과 걷는 중이라고 했다. 도니는 낙서가 가득한 흰 티를 입고 있었다.


도니는 길에서 만난 친구들에게 그 나라 언어로 그 나라 이름을 써달라고 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만났는지 티셔츠에 거의 빈 공간이 보이지 않을 지경이었다. 짧게 길을 걸으면서도 빽빽하게 친구들의 이름이 쓰인 걸 보니까 도니가 꽤 인싸인걸 알 수 있었다. 도니는 내 이름도 적어달라며 펜을 건넸다. 티셔츠 한 구석에 한국어로 된 내 이름도 앙증맞게 쓰며 도니와 그의 엄마 아빠, 아내, 그리고 아이들까지 함께 걷는 순례길에 평화를 빌었다.



아이건 어른이건, 짐의 크기가 크건 작건 저마다 자기 짐을 지고 유쾌하게 걷는다. 몸집이 작거나 어리다고 짐을 대신 들어주지 않는다. 함께 걷지만 자기 짐은 자기가 지고 가는 모습이 꽤 기억에 남았다. 도니는 모든 순간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지 연신 카메라와 액션캠을 들고 거의 빙빙 돌며 걸었다. 밝은 에너지가 넘치는 도니 덕분에 즐거움이 충전됐다. 정말 즐거운 에너지는 전염되는 게 맞나 보다. 도니는 헤어지기 전 무릎에 좋은 약을 건네주며 자기는 이제 거의 다 걸었으니, 내게 더 필요하 것 같다고 행운을 빌어줬다. 그간 건네받은 약이 몇 개 되는데 어느 하나 똑같은 게 없다. 


순례길 중반에 이르니 이제 어느 정도 통증과 함께하는 법도 배웠다. 어떻게 걸으면 덜 아픈지 요령도 생겼고, 중간에 너무 오래 쉬었다가 걸으면 더 아프다는 것도 알았다. 잠깐 휴식하고 꾸준히 걸어 일찍 도착해서 오래 쉬는 게 무릎에는 더 좋은 것 같다. 어느 한쪽에 무게가 실리지 않도록 천천히 걷는 게 가장 중요하다. 비뚤어진 몸 탓에 자꾸 한쪽으로 무게가 쏠리니 더더욱 천천히 걸어야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는다. 남 따라간다고 빨리 걷는 게 무릎에 제일 최악인 것 같다. 천천히 가더라도 끝까지 가보겠다는 마음으로, 이제 동민과는 따로 걸어야겠다는 마음을 먹었다.



 3줄 정리

- 까스트로해리스에서 프로미스타까지 25km

- 까마득한 내리막길 ㅠㅠ

- 유쾌한 도니와의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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