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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27. 2024

지나친 여유, 그 대가는

부지런히 걸어야 하는 이유

길에서 식당을 만나는 게 얼마나 큰 행복인지 아는가! 게다가 음식이 맛있다면 더할 나위가 없다. 걸으며 고생했던 기억이 싹 달아난다. 오늘은 인생 식당을 만났다. 날씨도 좋고, 여정도 무난했다. 거기다 음식이 아주 맛있는 식당도 만나고 풍경까지 좋으니 아주 살맛이 난다. 동민도 날씨를 타는지 기분이 좋아 보인다. 평소보다 더 개그 타율이 높아서 정신없이 웃었다. 박자가 딱딱 들어맞는 행운에 몸도 마음도 여유가 좀 생긴다. 오래간만에 가족들에게 안부도 전했다. 아플 때는 서러워서 생각나더니, 예쁜 거 보고 맛있는 거 먹을 때도 생각나는 게 가족인가 보다.


엄마 아빠에게는 걱정 끼치는 게 죽도록 싫다. 잘 지내는 모습만 보여주고 싶다. 새까맣게 그을렸지만 얼굴이 활짝 폈다며 까르르 웃는 엄마. 힘들면 언제든지 포기하고 돌아와도 된다는 엄마의 말투에는 여전히 걱정이 서려있다. 아빠는 친구들을 어떻게 사귀는지가 가장 큰 관심사다. 걱정 마! 바디랭귀지랑 함께면 다 통해! 내심 타지에서도 잘 살아남아(?) 있는 딸이 기특한지 흐뭇한 표정이었다. 죽다 살아난 생생한 소식을 전해 듣는 건 친구들이다. 무릎 아파서 고생한 얘기, 장염 걸려서 며칠 동안 못 먹은 얘기, 동행 쫓아가다 가랑이 찢어질뻔한 얘기... 이러나저러나 부럽다는 친구들의 대답이 빗발쳤다. 그래, 지금 이 길을 걷는 나는 정말 행운아다. 인생에 다시 오지 않을 날에 하는 사서 고생은 훈장과도 같은 것 아닌가. 교훈이든 배움이든 뭐든 남길 것이다. 낙관만 하기에 고생이 많은 순례길이라도 이 길을 걷고 나면 나는 조금은 다른 시선으로 인생을 대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연히 얻어걸린 식당에서, 진짜 맛있었던 점심


이제 무릎 부상은 오랜 친구인 듯 익숙하고 순례길 일상도 오래 지낸 일상처럼 살가워졌다. 그저 출발해서 목적지에 다다르기까지 쉼 없이 걷기만 했는데 오늘은 처음으로 한껏 여유를 부렸다. 오래 푹 늘어져 쉬었더니 다시 걷기가 싫다. 겨우 힘을 내 부지런히 걸었지만 당연히 평소보다 마을에 도착하는 시간이 좀 늦었다. 그런데 평소와 달리 마을이 소란스럽다. 아뿔싸, 부활절 주말이 시작되었다는 걸 잊고 있었다.



까리온 데 로스콘데스도 부르고스만큼은 아니지만 제법 큰 마을에 속한다. 숙소가 여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부활절을 맞아 길을 걷는 사람들이 많아지기도 했고, 가톨릭 국가의 축제로 손꼽히는 부활절이 코앞인 금요일이라서 그런지 까리온 중심에 있는 알베르게는 이미 다 찼다고 했다. 눈에 보이는 알베르게란 알베르게는 모두 들어가 봤는데 오늘은 자리가 없다고 한다. 이미 부활절을 보내러 온 예약손님으로 다 찬 상태다. 아... 식당에서 여유 부리고 놀지 말았어야 했는데... 후회가 밀려왔다.


까리온이 이렇게 붐빌 줄은 생각도 못했다. 한 알베르게 주인은 이곳에 산타 클라라라는 성당 때문에 사람들이 많은 거라고 했다. 이 성당의 미사가 순례길을 걷는 사람들에게 유명하다고 들었던 기억이 난다. 각 나라 사람들이 일어나 자기소개를 하고 모국어로 노래를 부르기도 하는 풍경을 본 적이 있다. 순례자들에게는 유명한 성당이라 들었지만 현지인들에게까지 알려진 성당일 줄은 몰랐다. 이 마을 주변의 사람들까지 부활 축하를 위해 모이는 시기였다. 하필 이 날 한껏 여유를 부리고 늦게 도착했는지 모를 일이다.



후회해 봤자 늦었으니 실낱같은 희망이라도 붙잡고 부지런히 숙소를 찾기로 했다. 동민은 왼쪽, 나는 오른쪽 길을 맡아 보이는 숙소마다 빈 방이 있는지 물었다. 그러다 보니 어느새 마을 끝까지 다다랐다. 사실상 거의 마지막 숙소만 남아있었다. 만약 이곳에도 방이 없으면 지친 몸으로 다음 마을까지 걸어가야 했다. 제발, 제발. 너무 지쳤다. 게다가 이미 너무 늦은 시간이다. 그만 걷고 싶다. 동민도 짜증 난 기색이 역력했다.


"Do you have any room?"


정말 다행히 방이 있었다. 운이 좋았다. 언제나 그랬다. 최악의 상황까지 치달은 적은 없었다. 


숙소 앞에는 라벤더가 흐드러지게 피어있었다. 나는 라벤더를 꺾어와 인중에 올려 두었다. 좋은 향기가 났다.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내쉬어봤다. 오늘 오르락내리락했던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는다. 숙소 앞은 하얀 천을 두르고 부활을 준비하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웠지만 다른 세상 이야기인 듯 동민과 나는 몸도 마음도 많이 지쳐있었다. 


동민은 내게 바라는 것이 있었다. 더 이상 모른척하며 미룰 수만은 없는 이야기가 오고 갔다. 하지만 우리 이야기는 오랫동안 평행선을 달렸고 동민이 먼저 이제는 따로 걷자는 이야기를 했다. 동민은 정확했다. 정확한 개그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하더니 마음도 날카롭게 꿰뚫어본다. 나도 잘 모르겠는 내 마음을 동민은 어찌 알았을까? 너무 정확해서 서운하기까지 하다. 하지만 나는 동민이 바라는 것을 줄 수 없다. 동민 역시 내가 바라는 것을 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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