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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r 29. 2024

술례길의 서막

그 많던 끌라라는 누가 다 먹었을까

출발해서 17km를 걷는 동안 물 사 마실 곳도 없었다. 그나마 아침에 마을을 벗어나기 전에 마트에서 산 초콜릿이 있어서 다행이었다. 힘든 와중 다행인 건 그늘이 많이 없었는데 날이 흐린 덕분에 걷기가 좀 수월했다는 것. 그리고 덩그러니 놓여있던 돌 의자에서 잠깐 쉬어갈 수 있었다는 것.


3시간 남짓 걸었을까, 내리막 끝에 바가 보였다. 그곳에 홀린 듯이 들어가 옥수수가 들어간 야채전이랑 파스타에 고기까지 시켰다. 그리고 끌라라(맥주에 레몬시럽을 탄 것)도 한 잔 시켜 들이켰다. 와... 맥주가 이렇게 맛있었던가? 눈이 번쩍 떠지는 맛이었다. (이날로 맥주에 눈뜨고 이후로 걷다가 끌라라 마시는 재미 들림)

나를 살린 초콜릿..

순례길을 걸으면서 Hola!, Buen camino, 다음으로 가장 많이 한 말을 꼽자면 "아 난 정말 행복한 사람이다."라는 말이다. 생생한 자연을 벗하며 걷다 보면 절로 행복하다는 말이 나온다. 그런데 오늘은 그다지 행복하지가 않다. 무척 지루한 길 때문이기도 하거니와 어쩐지 헤어진 동민 생각이 난다. 


동민도 17km나 되는 길을 하염없이 걸어올 것이다. 바를 보면 들러서 물이라도 한 잔 마시겠지? 마주치면 인사라도 나누자. 30분쯤 뒤, 멀리서도 눈에 띄는 동민의 환한 가방이 보였다. 인사라도 건네려고 동민을 뚫어져라 봐서 분명 나와 눈을 마주쳤는데 식당을 그냥 지나쳐갔다. 아무리 따로 걷기로 했어도 모른척하고 지나가버리니 서운한 마음이 밀려왔다. 한 1초쯤, 확실한 사람이니 그럴 수도 있다고 스스로를 달래 보았지만 아무래도 서운했다. 나는 남은 음식을 꾸역꾸역 집어넣고 동민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허둥지둥 가는 내가 진짜 찐따 같고 없어 보여서 웃음이 났다. 



동민은 벌써 저만치 걸어가 버렸는지 아무리 둘러봐도 보이지 않는다. 이렇게 빨리 걸을 수 있었으면서 그동안 나에게 맞춰 걷느라 여러 날 아쉬웠을 것이다. 그래서, 이제 와서 동민을 쫓아가서 뭐 어쩔 건데? 혼자 걷고 싶었잖아. 막상 헤어지니 서운한가? 끝까지 평행선을 달린 어제의 대화가 못내 아쉬움이 남았던 걸까. 이제 내 걸음으로는 동민을 따라잡을 수 없을 것이다. 목적지까지는 10km도 채 남지 않았는데 동민을 쫓으려고 평소보다 빠른 걸음으로 걸었더니 발이 아렸다. 


허둥지둥 스텝

결국 발에 새끼손톱만한 물집이 잡히고 말았다. 좀 더 솔직할걸 그랬다. 솔직하게 마음을 말하고, 더 알고 싶다고 할 걸 그랬다. 이렇게 못다한 말에 아쉬움이 남을 줄 알았으면 조금 더 같이 걷자고 할 걸 그랬다. 알베르게에 동민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기대도 했지만 동민은 없었다. 그 와중에도 배는 고파오고 발가락도 아프고 몸이 돌봐달라고 아우성 치니 정신이 번쩍 든다. 먹고살아야 돼. 잘 쉬어야 돼. 그리고 계속 걸어야 해!


알베르게에는 한국 사람들도 몇 있었다. 지용과 상윤, 그리고 미라.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고 끌라라도 한 잔 더 보탰다. 파스타에 끌라라 한 잔이 오늘의 고단함과 아쉬움에 위로가 됐다. 정말 단순하기 짝이 없는 몸 마음이다. 수치심에 들끓었다가 이내 달달한 끌라라 한 잔에 되찾아오는 행복감. 이 어이없는 맥락이 웃기기도, 고맙기도 했다. 마치 고깃집에서 연인들이 싸우면서도 고기는 타지 않게 뒤집는 장면을 희화화한 개그프로그램처럼, 마음은 사나운데 일상은 물 흐르듯 흘러갔다. 밥도 먹고, 새로운 사람들과 이야기도 하고, 발에 물집도 처리하고, 내일 출발할 짐도 싸고 이런 서운한 마음은 별것도 아니게 지나갈 일인 듯, 하루가 저물었다.




3줄 정리

- 까리온 데 로스콘데스에서 레디고스까지 24km

- 술례길의 서막

- 그리고 새로운 만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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