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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May 06. 2024

순례길에서 한 눈 팔면 안되는 이유

게다가 핸드폰마저 먹통이라면

오늘은 생장에서 산티아고까지 절반 지점이 되는 마을인 사아군을 지나왔다. 이제 절반정도 걸으면 산티아고에 들어가게 된다. 절반쯤 지나니 점점 줄어드는 거리가 아쉽게 느껴진다. 처음으로 산티아고에 들어가는 상상을 해보았다. 어떤 기분일까? 후련함? 이제 끝났다? 기특하다? ... 그러다 영문도 모르게 갑자기 눈물이 고였다. 이 눈물의 의미는 뭘까? 막상 걸어보니 성치 않은 몸 보살피며 저녁 뭐해먹지, 다음 마을에서 끌라라 꼭 사 마셔야지, 오늘 알베르게 풀부킹이면 어쩌지, 아 코 고는 사람 없으면 좋겠다 등등 시답잖은 생각들이 대부분인데 왜 이 길 끝에 다다르는 생각만으로 눈물이 날까. 감정의 정체를 아직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중반쯤 걸었을까, 잘 되던 핸드폰이 갑자기 무한 로딩에 들어갔다. 전원 버튼을 눌러도 꺼지지 않고 까만 화면에 로딩모양만 돌아가는 것이 아무래도 불안했다. 아무리 수를 써도 먹통이길래 그냥 포기하고 방전되도록 내버려 뒀다. 진짜 가지가지한다. 당황해서 눈물이 쏙 들어갔다. 운이 좋다면 다시 켜질 것이고, 운이 나쁘다면... 어떻게 걸어야 하나. 막막했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지만 켜지지 않는 핸드폰은 오만가지 상상으로 날 불안하게 했다.


지친 마음을 웃게 하는 다정한 문구들


길을 잃지 않도록 최대한 촘촘히 표시된 화살표를 따라 걷는 길이지만 화살표가 나타나기 전까지 내가 잘 가고 있는지 수시로 의심이 들었다. 아날로그 인간이 아니라 그런지 종종 지도앱을 켜서 위치를 확인해야 안심이 됐는데 핸드폰이 먹통이니 불안했다. 또 지나가는 마을에 음식점이나 슈퍼마켓이 있는지 확인해 두면 조금 가벼운 마음으로 걸을 수 있건만 모르고 걸으려니 어쩐지 길이 더 길게만 느껴진다.


아니나 다를까, 이상하게 길이 점점 좁아지고 양쪽으로 풀이 무성해졌다. 이런 길도 있겠지 하며 발에 차이는 풀들을 무시해 버렸는데 한참을 걸어도 노란 화살표가 보이지 않는다. 앞뒤를 둘러보았지만 걷는 순례자도 없다. 길을 잘못든 것일까. 분명 노란 화살표를 따라 걸었던 것 같은데 어디서 길을 잘못 들었을까. 계속 걸어야 할까, 혹은 마지막 화살표를 봤던 지점으로 돌아가야 할까 고민이 됐다. 다시 되돌아가자니 걸어온 게 아깝고 희망을 갖고 계속 걷자니 어떤 길이 나올지 알 수가 없었다. 그저 낙천적인 마음으로 걷기엔 핸드폰도 망가졌고 마을이 나올 거라는 확신이 들지 않았다. 고생스럽지만 왔던 길을 다시 돌아가기로 했다.


정신 똑땍이 차리고 걷자


20분쯤 되돌아오니까 노란 화살표를 찾을 수 있었다. 화살표는 분명히 저쪽 방향을 가리키고 있었다. 내가 못 보고 다른 길로 들어선 게 너무 확실했다. 가슴 떨리던 해프닝이 화살표를 찾고야 마무리됐다. 안도의 한숨이 폭 나왔다. 남은 길은 눈을 부릅뜨고 숨은 그림 찾기 하듯 속속들이 화살표를 찾아내며 걸었다. 


숙소에선 한국에서 순례온 어르신들을 만났다. 같은 성당 식구와 순례 오신 아버님 두 분과 어머님 한분이다. 몇 살이냐, 혼자 용감하다, 가족은 걱정 안 하시냐 등등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 자연스레 가까워졌다. 어디 아픈덴 없는지 다정히 물으며 챙겨주시니까 고생한 여정에 응석을 다 부리고 싶어 진다. 그러나 어머님과 이야기를 나누다 응석 부리고 싶은 마음이 쏙 들어가 버렸다. 순례길을 걷고 싶어 무릎수술까지 하고 오랜 기간 준비하고 길에 올랐다는 말에 이 길을 얼마나 기다려 오셨을지가 다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과 순례 여정이 무척 만족스럽고 행복하다는 말이 내 마음에 날아들었다.


사실 나는 여정을 즐기고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때때로 그랬지만 대체로 그러지 않았다. 홀로 있음이 좋으면서도 싫었고 걱정이 많았다. 동민과 헤어지고 나서는 더더욱 혼자인 상황에 더디 적응하고 있었다.


천만다행으로 핸드폰은 완전히 방전됐다가 충전하니 다시 돌아왔다. 동민을 생각하며 들었던 분한 마음도 싹 잊어버릴 만큼 소란한 하루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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