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에서 제일 가는 샹그리아
"사.. 살려주세요!"
또 나쁜 꿈을 꾸며 깼다. 꿈에서 난 2층 집에 있었는데, 갑자기 계단 아래에서 검은 양복을 입은 깍두기 형님들이 우다다 올라왔다. 내가 문을 잠가야 하나 그들을 밀치고 탈출해야 하나 망설이는 찰나에 나를 데리고 집안으로 들어가며 화면이 까매졌다. 그렇게 육성으로 살려달라고 소리치며 깼다. 등에서는 식은땀이 주륵 흘렀다. 몸이 고단해서 그런 걸까. 순례길에서 악몽을 꾼 게 벌써 두 번째다.
동도 트지 않은 새벽이었다. 어르신들은 출발하려고 이미 짐을 꾸리고 있었다. 나도 눈이 떠진 김에 같이 걸어도 되는지 물었다. 환대와 함께 어스름한 빛조차 없는 캄캄한 새벽에 처음으로 길을 나섰다. 앞서 걷는 대장님의 헤드랜턴 빛과 스틱에 의지해 걷는 새벽길이었다.
혼자 걸을 땐 엄두도 못 냈던 새벽 출발. 한 번쯤 새벽부터 걸어보고 싶었는데 악몽 때문에 깬 날, 그것도 준비 없이 허둥지둥 출발할 줄은 몰랐다. 잠을 설쳤지만 오히려 정신은 더 명쾌하고 맑았다. 깜깜한 어둠에 적응될 때쯤 땅이 푸르슴히 밝아오는 게 느껴졌다. 시야가 트이며 잔뜩 예민해져 있던 청각이 느슨해지고 눈으로 길을 더듬어갔다. 어느새 노란 해가 봉긋 떠올랐다. 가장 어두운 새벽 동트기 전,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하나둘씩 배경이 켜질 때는 마음에서 조용한 환희가 터져 나왔다. 어른들에겐 이미 익숙한 풍경인 듯 걸어 나갔지만 나는 생경한 아침에 감탄이 서렸다. 함께 걷지만 각자의 침묵을 존중하며 네 사람의 발걸음은 바삐 움직였다. 저벅거리는 소리만 울려 퍼지며 조용히 밝아온 아침이었다.
아침의 평화를 깬 건, 저만치 앞에서 걷고 있는 동민을 발견하고 나서다. 동민의 유난히 튀는 밝은 가방은 멀리서도 한눈에 들어왔다. 나는 우연히라도 동민을 만나길 얼마나 바랐는지 동민의 가방을 보고서야 알아채고 말았다.
그런데 동민의 옆에 동행이 있었다. 게다가 여자인듯했다. 심장이 방망이질 치기 시작했다. 동민이 보고 싶었던 마음은 분노로 탈바꿈했고 나는 무릎을 아껴야 한다는 것도 잊고 어느새 폭주기관차처럼 동민 뒤를 쫓고 있었다. 나는 동민의 어깨를 톡톡 쳤다. 돌아보며 나와 마주친 동민은 당황한 듯 그 여자의 눈치를 봤다. 나를 반가워 할리는 없다고 생각했지만 이렇게 당황한 눈빛을 보니 짜증이 솟구쳤다. 뭔가 들킨 사람처럼 허둥거리는 동민에게 난 보란 듯이 며칠 전 그에게 받았던 장갑 한 쌍을 굳이 다시 쥐어주었다. 안 받겠다는 동민과 구태여 주겠다는 나의 신경전에 여자애는 눈을 흘겼다. 결국 내가 가방 옆구리에 장갑을 쑤셔 넣고 나서야 실랑이가 마무리 됐다. 여자애는 눈빛에 의문이 가득했고 동민은 우리를 뒤로 하고 앞서 걷기 시작했다. 마치 내가 훼방이라도 놓은 것처럼 분위기가 싸늘했다. 당황한 동민이 먼저 가버리자 우리는 짧게 형식적인 대화를 나눴고 그녀는 내게 무슨 사연인지 해명이라도 하라는 듯 물었다. 나는 둘 사이에 오갔던 이야기는 쏙 빼놓고 며칠 같이 걸었고 걸음이 달라 헤어졌다고만 짧게 대답했다. 그녀의 이름은 재희, 동민과 나처럼 홀로 순례길에 올랐다. 재희는 취조하듯 몇 마디 더 캐묻더니 입을 굳게 닫았다. 나는 내심 동민이 곤란한 상황에 처했길 바랐다.
이런 불편한 상황에서 같은 숙소에서 마주치지 않기를 바랐건만 최근 길에서 만났던 친구들을 한 숙소에서 몽땅 다 만나버렸다. 공유할 수 있는 사각형 모양의 넓은 마당이 있고 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아늑한 숙소였다. 어색한 마음을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숨길 수 있었으니 오히려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순례자들은 삼삼오오 모여 저녁을 같이 먹기 시작했다. 나는 둘의 기류를 본격적으로 살피기 위해 무리와 떨어져 앉았건만 힐끗거리는 것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같은 테이블에서 간간히 영어로 말을 섞던 친구 하비가 본격적으로 흥이 오르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하비는 초콜릿이며, 과일이며, 와인까지 사 오더니 하비표 샹그리아를 직접 제조해 주었다. 샹그리아 만드는 과정이 신기해서 꼬치꼬치 물으면 하비는 신나게 말하기 바빴다. 샹그리아엔 오렌지 껍질을 얇게 떠서 넣어야 한다는 것, 또 레몬 시럽도 넣어주면 좋다는 것 등의 팁들을 눈여겨보았다. (나중에 만들어보려고ㅋ) 설탕도 콸콸 붓고 국자로 휘휘 저어 손가락으로 찍어 먹는 하비 폼이 덩치에 안 맞게 앙증맞았다. 달달한 과일과 쌉쌀한 와인이 잘 어우러져 한 국자, 두 국자... 어느새 술은 동이 났고, 누군가의 기타 연주로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랐다.
그러다 모두가 알 법한 'La Bamba'가 연주되었다. 모두 박수를 치고 발까지 굴러가며 떼창을 하기 시작하는 중에 하비는 같이 춤을 추자며 나를 중앙으로 이끌고 나갔다. 술기운 탓인지 엉덩이가 수줍게 씰룩거렸다. 나도 모르게... 춤이랑 담쌓고 살던 나는 어디 가고, 나를 살짝 놓아버리곤 엉덩이를 마구 흔들었다.
생각해 보면 나는 동민과 영영 걷고 싶었던 건 아니었다. 일주일을 동민과 걸으며 나는 동민이 매력적인 사람이란 걸 알아챘다. 될 수 있으면 오래, 같이 걷고 싶은 마음도 있었지만 어쩐지 이 길 끝에 동민만 남는다면 아쉬울 거라 생각했다. 나는 한 번도 간파당한 적 없었던 나의 속마음을 보란 듯이 읽어버리는 동민이 신기하고 재밌었다. 나의 문장과 문장 사이를 읽어내는 센스에 감탄했다. 하지만 동민이 내뱉은 여러 마디 중에 가장 중요한 말이 빠져있었다. 그 칸은 늘 공백이었다. 동민은 내게 했듯 재희도 웃게 만들 것이고 재희의 숨어 있는 문장도 속속들이 읽어낼 것이다. 동민의 목적을 알 듯했다. 나는 동민이 훗날 술자리 안주로 가볍게 오르내릴 한 명이 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나는 동민에게 놀아나지 않았으니 다행이다. 그렇게라도 정신승리 하고 싶은 나의 얄팍한 마음은 동민과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랐다. 나는 못본 척 시선을 돌려버리고 더 신나게 춤을 췄다. 묘한 패배감을 느끼면서.
동민의 목적지는 이제 새로운 낯선 여자다. 내가 특별하지도 매력적이지도 않은, 지나가는 그저 그런 여자애 중 한 명일 뿐이라는걸 털어내듯 손가락은 허공을 찔렀고 발의 보폭은 더 넓어졌고 몸은 달아올랐다.
시간 가는줄 모르고 노니는 동안 집 나간 웃음이 되돌아왔다. 이제 더 이상 걸음으로도, 마음으로도 동민을 쫓지 않을 거라는 걸 나는 확신했다. 매력적이지만 치명적인 사람은 어찌됐든 좋을 리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