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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리미 May 21. 2024

순례길을 즐기는 세 가지 방법

for 베짱이|산마르틴까지

순례길 중 가장 기억에 남았던 길을 꼽자면 대도시 레온을 지나 산마르틴까지의 구간이다. 사실 찻길을 옆에 두고 걷는 구간이 길어 걷기 좋은 길이라고 할 순 없지만 가장 기억에 남았던 이유는 순례길 여정 중 나의 보폭으로 나의 속도에 맞게 가장 편안한 마음으로 걸었던 길이기 때문이다. 영혼의 길에 접어들 무렵, 동행 없이 홀로 즐기며 발견한 순례길 즐기며 걷는 세 가지 방법을 소개한다.



1. 순례자들과 스몰토크 나누기

다양한 국적, 다양한 나이대의 사람들을 만난다. 특히 이 날은 유난히 말을 섞은 순례자들이 많았다. 보폭이 맞으면 같이 걸으면서 스몰토크를 나누는데 외국인 친구들의 단골 질문 중 하나는 출신이다. 처음엔 'Korea'라고만 대답했는데 'North? or South?'라고 뒤따라 오는 질문 때문에 나는 처음부터 'South Korea'라 말했다. 나중에는 종종 North라고도 대답했는데 친구들의 눈빛에 스치던 당혹감을 보고 재미가 들렸다고 한다.ㅋㅋㅋ


코리아! 하면 당연 음식 얘기가 빠질 수 없다. 김치, 불고기, 삼겹살, 소주... 심지어 막걸리까지, 연신 들려오는 한국 음식 좋아요 피드백에 K-food의 위엄을 실감했다. 반면 한국은 휴전국가니 위험하지 않냐는 질문은 거리감 있게 다가왔다. 전쟁으로 생명의 위협을 느껴본 적은 일도 없다고 하니 의외라는 반응 또한.


가장 신선했던 질문은 순례길 걷는 동양인 대부분이 한국 사람이더라, 한국사람들은 왜 순례길을 많이 걷냐? 였다. 글쎄다? 왜 한국사람들이 가장 많을까? 첫 번째 질문을 받았을 땐 대답을 못했지만, 두 번째 질문에선 어렴풋이 정리된 생각을 말할 수 있었다. 아마 지나친 경쟁 구조 탓일 거라고. 사회에 던져지기 전부터 이미 시작되는 경쟁. 무의식적으로 친구를 경쟁상대로 인식할 수밖에 없는 입시 구조. 줄 세우기. 주류만 인정받는 사회에서 주류의 삶에서 배제되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나를 인식하는 눈을 멀게 한다. 두려움과 압박이 밀려드는 틈에서 순례길은 잃어버린 나를 찾기 위해 강제로 분리되고자 넘어온 세계다. 혹은 그 반대일 수도 있다. 순례길 완주라는 타이틀을 위해, 누구보다 빠른 시일 안에 도착하려고 하루에 40km씩 내달리기. 여전히 나의 능력을 증명하기 위한 걸음일 수도. 이야기를 듣던 친구는 너무 빨리 걷는 사람들을 보면 대부분 한국사람들이었다고 한다. 애잔함이 밀려왔다. 이 길에서마저 속도를 내며 달려야 하는 사람들의 사정이 궁금해졌다. 무엇이 우릴 순례길로 떠나게 하는가.



2. 까무룩 낮잠 들어보기

그늘 한 점 없는 길을 걷다 지칠 무렵, 나무 그늘 아래 무지개 색의 해먹과 간단한 요깃거리가 마련된 작은 쉼터가 나타났다. 기부제로 운영되는 자연 속 공간이었다. 잠깐 쉬었다 가려고 짐을 풀고 누웠는데 몸을 포옥 감싸는 해먹 안에 누워있자니 잠이 쏟아졌다. 살랑살랑 흔들리는 리듬이 자장가처럼 나를 재웠다. 


잠깐 쉬는 와중에도 '해야 한다'는 마음은 계속 변죽을 울린다. '오늘 내가 제일 늦게 들어가는 거 아냐? 알베르게에 자리가 없으면 어떡하지?(며칠 전 부활절 축제로 숙소 없어서 애먹었던 게 갑자기 생각남) 도착해서 푹 쉬면 되지 왜 중간에 퍼질러 쉬고 난리야? 빨리 일어나서 걸어!'


그러나 이 날은 게으른 마음이 보란 듯이 이겼다. 그러든가 말든가, 늦으면 어때, 자리 없으면 뭐 조금 더 걷지, 왜 힘든데 쉬었다 가면 안 돼?라고 모든 해야 하는 마음을 쳐내는 베짱이 마음이 무척이나 기특했다. 왜 그리 해야 하는 것들 틈바구니에서 해내기 바쁜 삶을 살았담. 나는 나의 속도로 걷는 순간을 체화하며 오롯이 자연의 소리에 접속해 휴식했다. (그 짜릿함을 잊지 못하고 이 날 이후로는 걷다가 피곤하면 판초를 깔고 그늘 아래 발라당 누웠다고 한다.)


가뭄에 단비 같은 쉼터를 운영하시는 분께는 넉넉한 성의를 드렸다. 나는 몸 마음이 가득 충전된 상태로 목적지를 향해 다시 걸을 수 있었다.



3. 브금 리스트 만들기

그날의 무드에 알맞은 선곡은 열 친구 안 부럽다! 이쯤 걷다 보면 처음 순례길에 오른 날과 마음이 많이 달라진 걸 느낀다. 자연스럽게 선곡도 변하게 된다. 나는 데이터가 정해진 유심을 사서 길에서 무한 스트리밍은 못했고 플리가 지루해질 때면 숙소에서 한 두곡 다운받아 놓곤 했다.


이 무렵 추가된 브금 리스트가 하나 있었으니, 그 당시 Shape of you로 막 유명세를 타던 Ed Sheeran의 곡 중 하나다. 그러니까 너도 나를 사랑한다고 말해줄래,라는 낭만적이고도 구질구질(?)한 고백이 담겼는데 바에서 흘러나오는 가사를 듣다가 꽂혀 그날로 플리에 저장된 곡이다.


How do you feel? 왔다가 떠나고, 있다가 사라지는 것들을 생각하며 하지 못한 말, 듣고 싶은 말을 떠올리며 걸었다. 차도 옆을 걸을 때 소음 상쇄 및 지루함을 덜어주는 최고의 처방이었음!




3줄 정리

- 만시야 데 물라스에서 레온까지, 18km / 레온부터 산마르틴 델 카미노까지 27km'

- 영혼의 길에 접어들었다!

- 나의 속도대로 걸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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