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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Oct 18. 2024

사랑과 우정사이2

나도 누군가에게 행복이었으려나

지용은 걸음이 맞는 상윤과 같이 걷고 나는 다시 혼자 걷기 시작했다. 그래도 걷는 방향이 같으니 자꾸 마주쳤고 그런대로 함께 걷기도 하니 말벗이 있어 좋고 혼자 걸을 땐 풍경이 눈에 선해져서 좋았다. 그래서 만나면 반가워하고 보폭이 차이나면 굳이 좁히려 노력하지 않았다.


다시 시작된 내리막 코스는 무척 가팔라서 다리가 후들후들거렸다. 스틱에 체중을 실으면서 가려니 팔도 뻐근했다. 내리막이 끝나면 또 다시 오르막, 그리고 또 다시 내리막... 그러다가 마을로 이어지는 평지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하루에도 몇 번씩 바뀌는 풍경이었다. 아기자기한 깃발을 걸어둔 마을을 지나 그늘 하나 앞는 포도밭길을 지나 한참 걷다보면 푸른 초원에서 풀 뜯어먹는 소들을 마주친다. 봄이 온걸 알리며 피어난 양귀비 꽃밭을 한참 넋놓고 보다가 한낮의 태양에 걸음을 재촉했다.



오늘 도착지로 정했던 마을보다 5km전 마을인 비야브랑카에서 나는 걸음을 멈췄다. 작고 고즈넉한 마을이었다. 광장 카페에는 순례자들로 보이는 사람들과 어르신들이 모여 여유로운 오후를 보내고 있었다. 쉬어간다면 이런 마을이어야해! 평화로운 풍경에 햇살까지 따사로이 내리쬐니 어디라도 앉아있고 싶어졌고 눈에 들어오는 편안하고 아늑한 사립 알베르게를 찾아 짐을 풀었다.


'누나 어디야?'


지용에게 연락이 와있었다. 나는 전마을에서 짐을 풀었다고하고 내일 길에서 만나자고 전했다. 실망스러운 마음을 전해온 지용이었으나 걷다가 또 만날 수 있지 않은가? 무엇보다 오늘은 조용히 쉬어가는게 우선이었다.


짐을 푼 알베르게 아래층에는 유럽풍의 아기자기한 카페가 있었다. 오래간만에 짐을 다 풀고 카페에 앉았다. 따뜻한 차 한잔에 몸이 녹으며 긴장도 풀렸다. 이제 내게 남은 여정을 헤아려봤다. 예정대로라면 일주일정도 후엔 산티아고에 도착할 것이다. 이 여정이 끝나면 매일 떠오르는 날것의 감정을 더이상 마주하지 않아도 된다. 미움, 연민, 질투, 분노, 애정, 설렘, 실망, 소외감, 거절감... 얼마나 낯선 감정을 마주했는가. 나는 그렇게 성숙하지도 않으면서 눈가리고 아웅하듯 얼마나 애써 감정들을 달래려했던가. 고스란히 그 감정을 느낄 새도 없이 또 다른 상황 또 다른 감정을 마주해놓고는. 그때 갑자기 파도처럼 울컥울컥 감정이 밀려들었다. 나는 미지근해지는 찻잔을 붙잡고 그대로 눈을 감았다. 



힘들고 외롭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다. 그 감정 끝에 흐지부지 지나간 인연들과 의리 없이 저버린 관계가 떠올랐다. 무자르듯 확실하지 않은 관계에서 나는 죄책감을 느끼는 한편 짜릿함도 느꼈다. 매번 다른 풍경이 신선하면서도 낯설고, 뿌듯하면서도 고된 여정이었다. 이제껏 알던 내가 정말 내가 맞는지, 얼마나 많은 가면을 쓰고 살아왔는지 실감났다. 벌거벗겨진듯 마주한 지금의 나를 부정해줄 수 있는 예전의 나를 잘 아는 사람들과 가족들, 친구들이 보고싶고 그리웠다.


나는 카페 배경음악으로 흘러나오는 덤덤한 남자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How do you feel 

If I told you I loved you

It's just something that I want to do

I'll be taking my time, spending my life

Falling deeper in love with you

So tell me that you love me too


Tell me that you love me too

Tell me that you love me too

...



사랑의 대상이 누구인지도 모호해진채 나는 사랑을 그리워했다. 그간 꾹꾹 눌렀다가 터져나온 마음을 데리고 마을을 한바퀴 돌면서 다음 마을로 향하는 다리 위에 섰다. 다리 아래로 강이 시원하게 흘러내려가고 있었다. 이 감정도 다 흘러갈 것이다. 언젠가는 조금 더 용기내어 모든 것을 부인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바라볼 것이다.



'누나 지금은 어디야?

나 비야브랑카 왔어.'


지용이 남긴 카톡을 보고 나는 깜짝 놀랐다. 분명 다음 마을에 도착했다고 했는데 어떻게 비야브랑카로 온걸까? 다급히 전화를 걸었더니 헉헉거리는 숨소리 너머 들뜬 지용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렇게 만난 지용은 땀이 흠뻑이었다. 5km를 되돌아 온 것이다. 가쁜 숨을 몰아쉬면서 웃는 지용을 보는데 기가막혀 헛웃음도 나고 귀엽기도하고 뭐랄까, 한편으로는 내가 증명받고 싶었던 사랑이 눈 앞에 있어 마음이 놓였다고 해야할까.


"힘들게 왜 왔어? 내일 길에서 또 만나면 되지."

"얼굴 보고싶어서."


너무 맑고 투명한 말에 나는 말을 잃고 웃음으로 대신했다.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은건 모두의 욕망이다. 나는 오래간만에 순수하고 따뜻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우리가 이야기를 나눈건 고작 10분 남짓이었다. 10분을 보려고 거꾸로 달려온 지용의 무모함과 패기에 어린 나의 모습이 겹쳐보였다. 철모르고 마음도 아낄 줄 모른채 열과 성을 다해 사랑하기 바빴던 날. 아끼다 똥될까 퍼주기만 했던 그때의 나도 누군가에게 이렇게 따뜻하고 잔잔한 파동을 주었으려나. 나는 지용의 손을 꼭 잡아 손등을 쓸며 고맙다는 말을 대신했다.


지용은 해가 지기전에 다시 돌아가야했다. 다시 산길을 넘어가야 한다. 마을 어귀까지 지용을 배웅하며 당연한 약속을 했다.


"내일 다시 길에서 만나자!"


나는 양 손을 머리 위로 높이 들고 지용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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