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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Nov 15. 2024

사자대면

두둥

내리막길로 시작하는 여정. 간 밤에 비가 내려 길도 더 미끄러웠다. 스틱에 체중을 분산시키며 내려가보았지만 걸음은 점점 더 느려진다. 같이 걸음을 시작한 지용의 걸음마저 느려져 먼저 가라고 했으나 차마 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었다. 오늘은 내리막 구간이 길어서 초반에 무릎이 아프면 절대 안 된다. 차라리 거꾸로 내려가보자. 뒤로 돌아 내려가니 다행히 무릎 통증이 조금 덜했다. 대부분 나에게 행운을 빌며 지나쳐가는데, 웬 독일출신 형제가 걸음을 멈춰 섰다.


"Give me your backpack"


그리고는 다짜고짜 가방을 달라는 게 아닌가. 가방이 없으면 내려가기 좀 더 수월할 거라며 내리막 구간이 끝나는 길까지 옮겨주겠단다. 나는 무척 감동하여 쏘스윗하다는 말로 감사를 표했지만 성인 남자라도 내리막길에 가방 두 개는 무리가 아닐까? 망설이는 내 눈빛을 눈치챈 친구는(벌써 내적 친구가 됨) 덧붙여 말한다. 나 군인 출신이야. 이 정도는 끄떡없어. 가방 내놔.


그런데 옆에 있던 지용이 오히려 괜찮다며 친구들을 보내버렸다. 아니 왜? 나는 이제 몸도 마음도 한없이 약해졌고, 드디어 길에서 베푸는 호의와 도움을 받을 준비가 됐는데 왜 돌려보내는 거야? 어깨를 으쓱해 보이고는 그 험한 내리막길을 총총 뛰어내려 가는 듬직한 독일인 친구들의 뒷모습과 지용을 번갈아 보고는 왜 그랬느냐 물었다.


"누나가 힘들면 내가 들어줄 수 있어."


나는 지용의 마음을 읽어내고 힘들면 가방을 건네겠다고 했다. 도움을 주고 싶어 하는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길에서 만난 인연 대부분이 그렇듯이 길에서 만났다는 것 자체로 특별하지만 지용은 내게 좀 더 특별하게 기억된다. 지용에게 느끼는 감정은 이성적인 끌림보다는 인간적인 끌림에 더 가까웠다. 서로가 가진 배경을 똑 떼놓고 길에서 마주한 우리는 서로 무엇을 가졌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따져 물을 틈도 없이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가까워졌다. 나는 지용의 순수함과 맑음을 애정했다. 속이 다 보이는 뻔한 눈빛이 좋았다. 지용은 나의 무엇을 애정해 주었으려나. 우리는 서로 밝혀 말하진 않았으나 서로의 존재가 이 길에서 위로와 힘이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용은 걷는 동안 종종 노래를 불러달라고 했다. 그러면 나는 한치의 부끄럼 없이 노래를 불렀고 지용은 염치도 없이 답가도 부르지 않았다. 그렇게 투닥거리다 보니 어느새 풍경도 바뀌어 있었다. 덕분에 생각보다 빠르고 수월하게 내리막 구간을 내려왔다.



오늘의 목적지에서는 지용의 일행, 상윤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뜻밖의 반갑지 않은 소식도 함께 전해왔다. 바로 동민과 새로운 동행 재희도 그곳에 함께 있다는 소식이었다. 나는 본능적으로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 마음이 들었다. 지난번 마주친 재희의 싸늘함이 먼저 떠올랐고 허둥지둥 도망치듯 가버린 동민을 다시 만나 서로 불편하기밖에 더하겠는가. 오늘은 다른 마을에서 멈추겠다고 했으나 내 속을 알리 없는 지용은 끝까지 같이 걷자고 한다. 


아니나 다를까, 숙소에 들어선 나와 지용을 보고 동민은 적잖이 당황한 눈치다. 이럴 땐 길이 하나뿐인 것이 야속하기만 하다. 피하고 싶은 인연도 어쩔 수 없이 숙소에서 만나게 되는 운명이라니. 동민은 재희의 눈치를 보고, 재희는 나에게 물을 것이 있는 모양인지 틈틈이 내가 혼자 있을 때를 기다렸다. 그 와중 씻고 나온 지용은 야무진 손으로 묵묵히 저녁을 준비했다. 천성이 맑고 명랑해 보이던 재희는 드디어 둘만 있게 되자 나와 지용에게 둘이 무슨 사이냐며 가볍게, 하지만 뼈 있게 물었다. 그런들 무슨 상관인가? 대답을 피했는데 동민과는 왜 따로 걷게 됐는지도 따져 물었다. 정말 정확히 따져 물었다. 대답해야 할 의무는 없었지만 재희에게 중요한 문제인 듯했다. 나는 걸음이 달라 따로 걷기로 했다고 했는데, 이어진 재희의 말에 나는 입을 떡 벌리고 말았다.


"오빠 말로는 언니가 자꾸 같이 걷다고 해서 도망친 거라던데."



다짜고짜 따져 묻는 재희에게 화도 치밀었건만 갑자기 찬물을 끼얹은 듯 화가 착 가라앉았다. 동민이 정말 그렇게 말했다면 동민은 반만 진실을 말한 것이다. 지난번 길에서 우연히 만난 이후 재희는 마음에 물음표를 하나 가지고 다닌 모양이다. 동민에게 내가 누군지 물었다면 동민이 자신에게 유리하게 말했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재희는 그래도 해결되지 않는 찝찝한 구석을 내게 재차 확인하려 물어온 것 아닐까. 그 물음에서 재희가 동민에게 느끼고 있는 감정이, 아마 내가 동민과 걸으며 가졌던 마음과 비슷하리라 짐작되었다. 나는 어쩐지 재희에게 돌연 연민을 느꼈지만 그렇다고 재희의 경계심 가득한 마음이 느슨해질리는 없었다.


이렇게 얽힌 인연이 어찌저찌 식탁에 모여 앉게 됐다. 긴장감이 감도는 저녁 식탁에서 지용은 나의 빈 그릇을 채워주었고 동민은 여전히 큰 힘 들이지 않고도 사람들을 웃게 했다. 불평 많은 상윤도 변함없이 투덜거렸으나 밥맛은 좋았다. 고생한 하루 끝에 챙겨 먹은 든든한 한 끼 식사였다. 얽힌 마음이야 어찌 됐건 우리는 이 길을 비슷한 시기에 함께 걷고 있는 까미노 전우들 아닌가. 이렇게 쌓이는 미묘한 정이 불편한 마음을 넘어설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 길 위에서라면 조금 더 쉬울지도 모른다.


미우면서 동시에 좋고, 연민을 느끼면서도 밀어내는 복잡한 감정을 밥과 같이 꿀꺽 삼킨다. 이 길에서는 불편한 인연도 피하기 어렵다. 남은 여정에서 두 마음 중 어느 곳이 기우는지 지켜보며 계속 걷는 수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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