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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겨우내 Dec 11. 2024

전우들과의 저녁 식탁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것은

불편한 분위기를 한시라도 빨리 피하고 싶은 마음에 먼저 일찍 길을 나섰다. 그래봤자 길에서 다 만날 테지만 혼자 조용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이하고 싶었다. 잠을 푹 자서 그런지 컨디션도 좋았고 아침 햇살도 적당히 몸을 데워주었다. 이제 며칠 남지 않은 순례길 아침을 마음껏 누려야지. 첫 마을을 막 빠져나갈 때쯤 웬 강아지 한 마리가 걸음을 맞춰 쫄래쫄래 따라오기 시작했다. 보니까 어제 도착 마을까지 함께 걸어온 녀석이 아닌가!


"또 만났네?"


밤새 어디서 비를 쫄딱 맞았는지 털이 옴팡 젖어 있었다. 그렇게 해가 머리 위로 떠오를 때까지 한참을 같이 걸었다. 생장에서 출발해 피레네를 넘어올 때도 길을 안내해 주던 강아지 한 마리가 있었다. 그 안내자도 내가 걸음을 멈추면 같이 걸음을 멈춰 쉬었고 내가 걸으면 또 함께 걸었는데, 이 녀석도 앞장서서 걸으면서 내가 걸음을 멈추면 같이 멈췄다. 이름하야 길 위의 수호천사. 순례자를 올바른 길로 안내하는 존재. 나는 동물과 이렇게 깊은 교감을 나눠 본 경험이 없었기에 같이 걷는 모습이 신기하기만 했다. 사람의 걸음을 재고 함께 걷는다니. 배를 만져달라고 발라당 누워버리는 걸 보면 영락없이 귀여운 강아지였다가, 나의 속도를 맞춰 함께 멈췄다 걷는 수호자도 되어주니 심심치 않았다. 



순례길에서 동물을 만나는 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다. 시골길을 따라 걷다 보면 소도 말도 여기저기서 볼 수 있다. 마을마다 강아지, 고양이가 사람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간다. 하루에도 몇 십 명씩 낯선 사람을 맞이해서 그런지 사람에게 경계도 없고 오히려 먼저 성큼 다가와 걸음을 멈추어 쓰다듬어주길 몇 차례였다.


순례자를 지켜주는 수호천사는 때로는 강아지의 모습으로, 때로는 바람으로, 아침 햇살로, 어떤 날에는 지나가는 사람의 다정한 말로 순례자들을 찾아온다. 그걸 알아차릴 수 있는 기민함만 있다면 그렇게 외롭지만은 않은 길이다.


대부분의 순례자들은 순례 리듬에 익숙해지며 하루하루 점점 몸이 깨어난다. 그런 와중에 그 드넓은 길에 홀로 걷고 있자면 근원적인 고독과 외로움이 느닷없이 찾아오기도 한다. 그러면 훌쩍 울기도 하고 무거운 마음을 덜어내고자 노래도 불러본다. 길 위의 수호천사들의 도움을 받아 계속 걸음을 옮긴다.


고단한 몸, 여기저기 쑤시는 근육통에 익숙해지며 비로소 고통을 즐기게 되었을 무렵엔 주변과 가까이 연결되는 기쁨도 맛보게 된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연결, 자연과의 연결, 동물과의 연결... 혼자가 아닌 듯한 연결감을 느끼며 길 위에서 홀로 고독히 걸어온 시간을 위로받는다. 이것도 저것도 다 순례자들에게 주어진 신의 선물 같다. '그동안 네가 얼마나 소중한 것을 가지고 살아왔는지 보아라. 가진 것을 세어보아라.' 많은 걸 두고 꼭 필요한 짐만 가지고 오른 순례길에서 얼마나 많은 것을 가지고 있었는지 알게 되는 것 또한 아이러니하다.



어느 순간 순례길이 점점 소란스러워지고 멀찍했던 순례자들 사이의 간격도 좁아지기 시작했다. 사리아로 구간에 접어든 것이다. 가족 단위, 무리를 지은 청소년들이 많이 보였다. 사리아는 산티아고로부터 100km 떨어진 지점으로 이 지점부터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완주증을 받을 수 있다. 그래서 이 지점부터는 순례자가 많아진다고는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단체 순례객이 많아 생장에서부터 혹은 자기 나라에서부터 순례를 시작한 사람들은 산티아고 대성당에 도착하기 전 몸과 마음을 정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무리에서 멀어지기도 한다 들었다. 그런 말이 무색하게도 오늘 숙소는 시끌벅적 요란했다. 100km 지점에 도착한걸 함께 기념하는 날로 활기가 넘쳤다. 며칠 전부터 함께 걸었던 순례자들을 한 숙소에서 만난 것이다. 


나에게 백팩을 넘겨달라던 독일인 순례자와 며칠 전부터 계속 마주친 스페인 출신 순례자 무리, 성적인 농담을 서슴지 않고 해서 눈살을 찌푸리게 한 순례자, 그리고 우리 미움다툼시기질투 가득한 한국인 전우들까지 함께 모여 저녁식사를 차렸다. 스페인 출신 순례자가 다른 순례자들을 환대하는 마음으로 요리를 대접해 주겠다고 했다. 앙증맞은 레터링까지 얹어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빠에야였다. 한 솥의 음식을 열댓 명의 친구들이 나누며 남은 여정을 위해 건배도 외쳤다. 순례의 여정이 이제 일주일 안으로 마무리될 것이다. 이렇게 한 자리에 모여 떠들고 있자니 어쩐지 미워하는 마음은 뒷전이 된다. 


우리는 가위바위보를 해서 식사 당번, 설거지 당번을 정했다. 그간 얄미웠던 동민이 많은 설거지를 해야 해서 고소한 마음이 들었다. 사람들과 함께 한바탕 웃고 나니까 말이 너무 많아 불편했던 상윤도, 나를 경계하던 재희도, 내 속을 뒤집어 놓던 동민에게도 어쩐지 연민의 마음이 든다.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탄 덕분일까. 얼떨결에 미움뿐이었던 마음에서 조금은 한 발자국 물러나 다른 사람에게 나의 공간을 내어줄 여유가 생겼다. 자의든 타의든 마음먹지 않아도 자연스럽게 풀어지는 일이 있다는 경험은 앞으로도 나의 인생에 중요한 나침반이 될 것이다. 


우리는 서로 돕고 격려하며 여기까지 걸어왔다. 길에서 만났다가 또다시 헤어지고, 다시 길에서 만났다. 순례자들의 웃는 모습, 자신 안에 깃든 평화를 나누는 모습, 단순한 리듬의 즐거움, 적은 음식도 나눠먹는 배려의 마음속에 선함이 있다. 말로 하지 않아도 충분했고 충만했다. 사람들 사이에 필요한 모든 것이 길 위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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