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축제의 밤에 다다르고 나서
순례길행 티켓을 구입할 무렵, 나는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것이 아니라는 불현듯 인 감정에 퇴사를 마음먹고 남몰래 6개월가량 준비하여 오른 길의 마지막이 다가오고 있음에도 나는 여전히 헤매고 있었다. 순례자 마음이야 어떻든 그래도 아침은 밝아오며, 순례자는 길을 떠나야만 한다. 아침부터 비가 추적추적 내린 탓에 으슬으슬 한기가 도는 몸으로 도심을 막 빠져나가는데 맞은편에서 버스가 한 대 지나쳐갔다. 행선지는 SANTIAGO. 이틀 후면 도착해 순례를 마무리할 도시였다.
그 순간 울컥하며 오늘 40km를 걸어 산티아고에 도착해야겠다는 마음이 든 이유는 무엇 때문인지 모른다. 원래는 30km를 걸어 산티아고 10km 전 마을인 라바코야에 도착해 쉬어갈 예정이었다. 평균 25km 정도 걸어왔던걸 감안하면 40km는 나의 체력에 무리가 될 수 있는 거리다. 하지만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힘든 이끌림에 나는 오늘을 마지막으로 산티아고에 도착하리라 마음먹었다.
마지막 여정은 지용이 함께했다. 그는 처음 긴 거리를 걷는 나를 염려했지만 어쩐지 40km쯤은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날씨는 좀처럼 맑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으며 순례자들 위로 비를 퍼부었다. 질척한 물웅덩이를 밟을 때마다 기능 좋은 고어텍스 등산화를 고른 나를 칭찬하면서 또 가끔 비가 멎어 구름 사이로 해가 쏟아져 내려오면 아름다운 풍경에 할 말을 잃어가면서 35km쯤 걸어왔을 무렵, 도착을 얼마 남기지 않고 체력이 급격히 떨어지는 걸 느꼈다. 5km. 딱 5km만 더 걸으면 된다. 하지만 다리는 점점 풀리고 짐은 천근만근 무겁고 몸은 물먹은 솜처럼 축축 쳐져만 갔다. 게다가 감당할 수 없이 쏟아져내리는 비에 우리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야. 이건 진짜 아니다!"
산티아고 입성을 단 몇 킬로 남겨두고 일단 눈에 들어오는 카페로 몸을 피한 우리는 갑자기 다른 행성에 뚝 떨어진 사람들처럼 사태파악을 위해 허둥지둥거렸다. 카페에는 이미 비를 피해 몸을 녹이는 순례자들이 가득했다. 대부분 평온을 되찾은 채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고, 우리는 이제 막 은신처에 몸을 피한 생쥐꼴을 하고 있었다. 따뜻한 장작불에 앉아서 몸을 녹이고 있으니까 집 나간 정신이 차츰 돌아오기 시작했다. 눈앞에 놓인 따뜻한 라떼도 그제야 보였다. 지용도 조금 지친 기색이었다. 눈도 풀리고 입도 헤 벌어진 넋 나간 얼굴로 묻는다.
"누나, 계속 걸을 수 있겠어?"
"응. 갈 거야."
고집인지 의지인지 모르겠는 마음이었다. 한 가지 확실히 아는 것은 오늘 분명 나는 산티아고에 도착하고 싶다는 것이다. 이제 한 시간가량만 걸으면 된다. 달달한 음식을 먹으며 몸을 녹이니까 다시 걸어갈 기운도 좀 났으니 다시 걸어보자. 그렇게 다시 한기가 도는 길로 나섰다. 비도 잦아들어 도란도란 시답잖은 대화를 주고받을 수 있는 상황이 되니 제법 길의 마무리를 준비하는 기분도 든다.
"오늘 산티아고에 도착하면 제일 먹고 싶은 음식은?"
"타파스! 그리고 맥주!"
"도착하면 기분이 어떨 거 같아?"
"음... 글쎄..."
사실 그런 고민을 할 정신상태가 아니었다. 남아있는 정신력을 끌어 모아 어떻게든 도착할 생각뿐이었다. 내 다리가 내 다리가 아니여... 하고 거의 기계적으로 움직일 때쯤, 비로소 산티아고 도시 초입을 알리는 표지판이 나타났다. 이제 다 왔다. 살았다. 하지만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라는 교훈을 몸소 배워 알고 있었다. 도시 초입부터 대성당까지도 거리가 꽤 남아있으니 긴장의 끈을 놓지 말자. 때마침 고생한 순례자 둘을 축복하기라도 하듯 하늘도 빼꼼 맑은 빛을 허락해 주었다. 햇살 한 줄기에 고단한 마음이 녹아내린다.
대도시인만큼 정돈된 공원과 가게들이 길마다 보였다. 스페인 사람들의 생활 모습이 한 층 와닿는 풍경을 한참 지나쳐 갔다. 노란 화살표를 따라 좁은 골목에 들어서자 무리 지어 있는 순례자들과 더 자주 마주쳤다. 눈인사를 나누며 건물을 끼고 코너를 돌자 도착지라고 예상할 수 있는 커다란 광장이 눈에 들어온다. 순례자 행색을 한 사람들이 무리 지어 환한 모습으로 서로를 안아주고,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모습도 보였다. 그리고 그 끝에 산티아고 대성당이 눈에 들어왔다.
나는 광장 한가운데 가방을 던지다시피 내려놓고 냅다 누웠다. 기쁘고 감격스러운 마음에 안도의 한숨에 웃음도 섞여 나왔다. 해냈다. 결국 해내고 말았어. 스스로가 기특하고 대견해 감정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괴성도 터져 나왔다. 동시에 그간의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면서 왈칵 눈물이 난다. 모국을 떠나 낯선 언어와 낯선 풍경에 얼마나 긴장했던가, 순례자라는 이유로 얼마나 많이 조건 없는 호의를 받았던가, 반면에 그렇게 많은 순례자들을 만나면서도 얼마나 외로웠던가, 불쑥불쑥 드러나는 나의 민낯을 보면서 얼마나 자책했던가, 얼마나 괴로웠던가. '해냈다'라는 말 하나로 점철시켜 버리기엔 당혹스러운 감정도 함께 맞이하며 뿌듯하면서 괴롭고, 기쁘면서도 슬픈 마음을 어떻게 지나가게 해야 할까. 또 다른 숙제가 쥐어진 기분이었지만 드디어 뒤엉킨 마음 실타래의 끝을 찾아내 손에 쥐었다는 희망과 안도감에 마음이 벅차오른다.
어린아이처럼 엉엉 우는 나를 보면서 지용은 웃음을 터뜨린다. 나는 겨우 찾아낸 실타래 끝을 놓치지 않으려고 손에 꼭 쥐었다. 인간은 본연 외로운 존재라는 점, 그렇기에 혼자 살아갈 수 없으며 또 그렇기 때문에 함께 살아가는 것은 때로 고난이기도 한 점. 함께 살아가는 기쁨과 슬픔이 길 위에 있었고 나는 혼돈 속에서 그것이 피할 수 없는 진실임을 마주하고 나의 삶으로 건져 올렸다.
그날, 나는 처음 함께 길을 걸었던 은경과도 재회했다. 은경은 그 어느 때보다 맑고 환한 표정으로 나를 꼭 안아주었다. "언니, 결국 해냈내요." 그 말에 나는 다시 한번 눈물을 쏟아냈다. 은경은 이미 나보다 3일 전에 산티아고에 도착한 상태였다. 버스로 피스테라, 묵시아까지 다녀온 후 다시 산티아고로 돌아온 날에 마침 나를 만난 것이다. 내게 나로 살라는 힘을 마음을 불어넣어 준 은경. 단단한 마음을 동경하게 한 은경. 맑은 미소를 가진 은경과 완주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서 더할 나위 없이 기뻤다.
광장은 밤이 되자 축제의 분위기로 변했다. 현지인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이 악기를 가지고 연주를 시작하자 순례자들, 마음 사람들이 하나 둘 모여들었고 모두 어깨에 손을 얹어 기차를 만들어 행진했다. 국적, 종교, 인종,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모두 함께 순례 종료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나는 근원의 기쁨을 느꼈다.
만나게 될 사람은 결국 만난다. 맞이해야 할 감정은 삶에서 어떻게든 맞이한다. 겪어야 할 일은 결국 겪게끔, 그래서 내가 나로 살아가게끔 삶은 어떻게든 나에게 좋은 것을 허락해 준다. 그것이 비록 좋은 것으로 보이지 않을지라도 지나고 보면 그것은 분명 좋은 일이었다. 내가 열린 마음으로 삶에서 일어나야 할 일이 일어나도록 허락만 한다면 삶은 어쩌면 나의 생각보다 내게 더 좋은 것을 가져다줄지 모른다.
길 위에서 만나고 헤어졌던 인연들을 떠올린다. 자신과 타인을 믿으며 걸어온 길도 아스라히 펼쳐진다. 매일같이 뜨고 지는 해와 광활한 자연 속에서 나는 배웠다. 피곤을 넘어서는 기대감으로 매일 눈을 뜨고 침낭을 갠다. 길에게 나를 맡기고 걸다보면 어느새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진실, 순례자의 리듬이 주는 안정감과 정신의 고양, 우리의 존재방식은 언제든지 새롭게 정의될 수 있다는 사실, 나 사랑하고 타인을 사랑하는 마음을 나는 배웠다.
길의 끝에서 실타래 끝을 움켜쥔 나는, 기쁘고도 조금은 막막한 마음이 되었다. 삶이 무엇을 가지고 올지 기대되며 한편으론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나는 이제 진실을 마주할 용기를 가졌다. 나를 길에 오르게 한 부름에 마음 깊은 감사를 보내며.
'우리가 길을 잃기 전에는, 하나의 세계를 잃기 전에는, 자신을 찾는 여정을 시작하거나 우리가 누구인지도, 우리가 다른 존재들과 맺는 관계의 무한함이 어느 정도인지도 깨닫지 못한다.' -헨리데이비드소로
-THE END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