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야..
알베르게에 도착하면 아무리 피곤해도 꼭 하는 일이 있다. 침낭을 펴기 전 매트리스에 베드버그 (이름도 무시무시한 빈대) 퇴치제를 뿌리는 것! 지금껏 길을 걸어오며 귀찮아도 거르지 않았다. 물리면 가려움이 극심하다고 들었던 탓에 잔뜩 겁을 먹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껏 한 번도 물린 적이 없었다. 베드버그의 습격으로부터 안전했다고 자만한 탓일까. 며칠 방심한 틈을 타 베드버그에게 온몸을 뜯기고 만것이다.
사리아를 지나고부터는 길에서 더 자주 쉬어가곤 했다. 그날도 그랬다. 바에서 여유롭게 아침을 먹고, 넓게 펼쳐진 잔디밭을 만나면 냅다 누워버렸다. 날씨도 좋아 걷는 맛이 났다. 숙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여유로운 오후를 보냈다. 한국 순례자들이 부쩍 많아진 덕분에 어느 가게에서는 라면도 팔았다. 산티아고 도착도 머지않았겠다, 긴장이 풀리기 딱 좋은 날이었다. 며칠 퇴치제를 뿌리지 않았는데도 별 일이 없었다. 그리고 침낭 속에 쏙 들어가 깊은 잠에 들었다.
"너 어젯밤에 코 엄청 골더라."
"그럴 리가 없어!"
여느 때와 같이 누구의 잠버릇이 가장 고약했는지 투닥거리며 일어났다. 그런데 나는 뭔가 이상함을 감지했다. 온몸이 엄청 가려웠다. 혹시... 화장실로 달려가 재빨리 몸을 훑었다. 팔뚝, 허벅지, 종아리... 붉은 반점이 군집 형태로 올라와 있었다. 한 번 긁기 시작하니까 끝도 없이 가려웠다. 마침내 베드버그에 물리고 만 것이다.
걷는 동안 신경을 다른 데로 돌리려고 노력했지만 참을수록 신경까지 가려운 느낌이 들었다. 물린 부위를 손바닥으로 때리면서 어떻게든 달래기를 수차례, 알베르게에 도착해 확인해 보니 물린 부위는 더 크고 붉어져있었다. 이 가려움을 며칠 달고 살아야 한다니... 한 달 동안 이 가려움을 겪지 않았다니, 운이 좋았던 거다. 그래도 길의 막바지에서 물렸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그러거나 말거나 산티아고에 도착해 가는 것이 실감 나기 시작했다. 이제 길이 끝나간다는 아쉬움이 자주 찾아왔다. 이유를 알 수 없는 허무함과 함께. 함께 걸어온 동행들에게는 무 자르듯 단호하게 단정할 수 없는 감정에 사로잡혀 '애'와 '증' 사이를 오갔다. 특히 애정만으로 깊어진 지용과는 즉흥적으로 길에서 벗어나보기도 했다. 정말 맛있는 문어요리를 먹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무거나 잘 먹는 나보다 미식가인 지용이 더 신나 했다. 예정에 없던 일을 몇 가지 시도해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 보았지만 이제 여정의 마무리가 코앞에 닥친 것이 더욱 분명해질 뿐이었다.
저녁 식탁에 모여 앉아 내일 여정을 나눴다. 보통은 10km 지점을 남겨두고 라바코야에 머무르며 산티아고 입성을 준비한다. 침묵으로 자신의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마음을 정돈할 수 있는 마지막 여정인 것이다. 나도 그럴 계획이었다. 산티아고에 입성하기 전 이 길의 의미를 되돌아볼 시간이 필요했다. 막아낼 수 없이 밀려드는 허무함의 이유를 알고 싶었다. 동민과 상윤은 내일 40km를 걸어갈 계획이라고 했다. 길을 걷다가 헤어졌던 다른 일행들과 만나 완주를 기념한다고 하니 오히려 잘됐다. 나는 지용과 함께 조용히 길을 마무리하기로 했다.
그렇게 산티아고 입성을 이틀 앞둔 저녁, 침낭에 들어가 몸을 동글게 말고 누웠다. 잠이 잘 오지 않았다. 가려움 때문이 아니었다. 이제 이 여정이 끝이 난다. 내가 원하던 삶은 이게 아니라는 목소리를 듣고 무작정 오른 길이다. 앞으로 내가 어떻게 살아야 할지, 나는 그럴싸할 답을 찾아내지 못했는데 이렇게 길이 끝난다니... 며칠이 더 남았다면 조금 덜 아쉬울까? 생각해 보면 그것도 아닐 것 같았다. 허무함의 근원은 그것이 아니었다.
나는 어쩌면 나 자신을 너무 많이 사랑한 것이 허무함의 원인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타고난 눈썰미 덕분에 어렸을 적부터 뭐든 잘한다는 칭찬이 따라다녔다. 입시에 뛰어난 학생은 아니었지만 대학은 꽤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큰 어려움 없이 직장에도 바로 취직했다. 실패할 것 같다 싶으면 아예 일을 맡지 않거나 피했다. 실패와 좌절을 경험할 기회를 내게 주지 않으며 그렇게 성인이 된 탓일까, 20대 후반에 접어들자 작은 거절도 치명적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거절감을 느끼고 싶지 않아 선택한 방법은 모든 사람의 비위에 맞추는 착한 딸, 착한 친구, 착한 직장 동료, 착한 언니가 되는 것이었다. 모든 수식어가 '착한'으로 수렴되던 나였다. 마치 그것이 나인 것처럼 여겼다. 그것이 나여야만 했다. 그런데 막상 길에서 마주한 나는 착함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었다. 열린 마음으로 친절과 호의를 기꺼이 베푸는 사람들을 경계하는, 그저 그런 사람이라는 사실이 나의 마음을 너무 아프게 했다. 무엇보다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건 사실은 마음이 넓지 않은 나, 나에게 상처 주는 행동도 이해하는 척했던 나, 솔직하게 나의 마음을 전달하지 못하고 비난으로 돌려버리는 나, 속내를 숨긴 채 사람을 곁에 두는 나... 이 모든 모습이 나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진정 이타적인 사람이 아니라 사람들의 인정과 칭찬에 목마른 겁쟁이였다는 것을 나는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비로소 깨닫고 있었다. 길에서 얻은 용기를 힘입어 아무에게도 발설된 적 없는 상처를 비로소 열어젖히며 나에게로 돌아가는 길이 끝나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