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위에서 싹트는 우정.. 아니 사랑?
지용을 처음 만난 건 몸도 마음도 무척 힘든 하루를 보낸 뒤였다. 며칠 전, 동민과 헤어지고 물도 없이 허우적거리며 걸었던 날이었다. 아무랑도 말을 섞고 싶지 않았는데 하필 숙소에서 만난 사람이 말 잘 통하는 한국사람, 지용과 상윤이었다. 지용은 말수가 적었지만 상윤은 말이 끊이지 않는 수다쟁이였다. 지용은 나와 상윤이 나누는 담소에 귀 기울이며 간간히 미소를 띨 뿐이었다. 한국 사람들과 만나면 의례 주고받는 얘기지만 너무 노골적으로 나이, 직업, 출신 등등을 캐묻는 상윤에게 불편함을 느끼며 나는 그들을 피해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도 인연이란 게 있는 건지 자꾸 길에서 마주친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이어진 인연과 산티아고 여정을 끝까지 함께하게 될 줄은 몰랐다.
특히 지용과는 조금 특별한 밤을 보내게 됐다. 새로운 경험과 도전을 좋아하는 우리는 원래 도착지였던 마을을 지나 '만하린'이라는 마을로 향했다. 보통의 순례자들은 잘 머물지 않는 알베르게 같지 않은 알베르게를 찾아서. 마을이라고 하기도 뭐 한 산 중턱에 오두막 하나만 떡하니 있다. 샤워는 둘째치고 먹을 것도 구하기 힘든 곳. 모두가 함께 자는 2층 공간으로 안내받았을 때는 위생 상태에 둘 다 할 말을 잃고 말았지만 행여 실례가 될까 흐린 눈을 하고 콧등만 찡긋해 보였다.
그곳엔 장기간 숙박 중인 이탈리아 커플이 있었다. 그들은 집도 없이 차도 없이 딱히 어떤 직업이랄 것도 없이 유럽 전역을 떠돌면서 살았다. 그러다가 순례길을 걷게 됐고, 만하린 알베르게를 만나 몇 달째 집처럼 살고 있다고 했다. 나는 의아함이 생겼다. 집이 없어도 괜찮은가? 직업이 없는 것도? 그럼 돈은 어떻게 벌고, 삶을 어떻게 영위해 나가지? 돈을 쫓아가지 않는 자유로운 영혼을 보며 불편한 마음이 드는 한편 부러운 마음이 공존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뭘까? 떠도는 삶이 불안하지는 않을까? 불안하다면, 불안보다 중요한 가치가 뭘까? 나는 나의 색안경을 좀처럼 벗지 못한 채 그들을 뜯어 분석하기 바빴다. 얼마나 더 머물 예정이냐고 물었더니 그들은 어깨를 으쓱할 뿐이었다.
그들의 열린 미래에서 불안과 초조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들은 아무것에도 매인 것 없이, 목적지 없이 자유롭게 자기의 세상을 개척해가고 있었다. 자본주의 세상에서 암묵적으로 필요로 하는 것들을 따르지 않으며 불안을 무릅쓰고 모험하여 그렇게 자신을 찾고자 탐험하는 사람들. 무모일까, 용기일까. 자유와 안정은 영영 대척점에 서있는 가치라면 나는 여정이 끝난 뒤 어떤 삶을 추구하게 될까. 텁텁한 수프를 먹다 나는 숟가락을 내려놨다.
저녁도 시원치 않아 너무 배가 고팠다. 내일 아침, 바에서 먹고 싶은 음식을 떠올리면서 지용과 수다를 떨며 허기를 달랬다. 고단한 몸을 푹 쉬어가기엔 불편한 점이 많은 이곳에 굳이 들른 이유는 별을 보기 위해서였다. 산 중턱에 조명도 하나 없는 곳이니 별이 잘 보일 성싶었다. 고작 별이나 보자고 씻지도 못하고 고단하게 머물러 가는 게 맞나 내내 갸우뚱했지만 새벽에 마당에 나왔을 때 우리의 의문은 씻은 듯 사라졌다. 당장 쏟아질듯한 별들이 은하수를 이루고 있었다. 카메라 셔터 한방으로는 좀처럼 담을 수 없는 양이었다. 주변에 늑대가 산다며 밤에는 멀리 나가지 말라고 한 주인의 말이 맴돌았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무언가 덮쳐올 것만 같아 몸이 떨렸다. 이 떨림이 과연 공포 때문인지, 생전 처음 보는 아득한 풍경 탓인지, 이 모든 풍경을 공유하고 있는 지용 때문인지 모를 노릇이었다.
그날의 고된 여정 덕분에 나는 푹 잠들었는데 지용은 잠을 설친 듯했다. 빈대가 없는 게 이상할 정도로 열악한 잠자리였다. 우리는 침낭 양쪽 끝을 서로 맞잡고 팡팡 털었다. 뭔가 떨어진 것 같다며 소름 끼쳐하는 지용을 보면서 나는 배시시 웃음이 났다.
지용은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어린아이 같은 순수함이 있었다. 앞뒤 재지 않는 솔직함이 그랬다. 자기감정에만 충실한 이기심과는 달랐다. 말 없는 수수한 청년이라고만 생각했던 지용을 달리 보게 된 것은 며칠 전 같은 알베르게에서 쉬어갈 때 했던 말 한마디 때문이다. 동행들과 술을 한잔씩 걸치면서 하나 둘 취기가 오르기 시작할쯤 한 친구가 매일 매일 천천히 걷는 나에게 우스갯소리를 던졌다.
"누나, 그렇게 느리게 걸어서 산티아고 언제 도착해요~ 빨리빨리 가아죠~ 나처럼 30씩은 걸어요."
그런데 내가 맞받아치기도 전에 지용이 술잔을 쾅 내려놓으며 한마디 한 것이다.
"너! 우리 누나 무시하지 뫄!!"
어리숙해 보이는 말투와 서툰 표현에 웃음이 피식 새어 나왔다. 흥분하면서 와인 병까지 깨뜨렸다. 손 많이 가고 그 어느 누구에게도 잘 보이고 싶지 않은 듯이 행동하는 지용의 2프로 부족한 모습에 나는 자꾸 관심이 갔다. 깨진 와인 병을 정리하다가 손을 베인 나에게 약을 발라주던 뭉툭하지만 세심한 손때문일까, 아니면 속 모르게 빙그레 웃던 미소 때문일까. 그후 지용은 어느 시점부터 말을 걸면 얼굴이 빨개진다던가 눈을 피한다던가 허둥지둥거리며 마치 낯선 감정을 맞이한 사춘기 소년처럼 굴었다. 지용은 더 다가오지도 못하고 더 멀어지지도 못한 채 나에게 작은 호의를 보내며 아슬아슬 선을 넘었다.
그렇게 지용은 내게 우정인지 사랑인지 명명할 수 없는 새로운 감정을 가져왔다.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는 곳에서 서로에게 몰입했던 저녁 식탁과 삶의 방식을 논하던 자유로운 대화의 흐름, 그리고 머리 위로 쏟아지던 별들과 짙은 밤하늘을 떠올리면 어수룩한 지용이 함께 떠오르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