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리미 Dec 07. 2022

누구든 처음은 어려울거야

파리-바욘-비아리츠까지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꼭 해야할 것 같은 순례길 미션, 바로 '혼자 잘 지내보기'. 왜 그런 가혹한 미션을 나에게 굳이 쥐어주었는가. 주말이면 늘 미리 잡아둔 약속에 이불을 박차고 나가기 바쁘고 끼니도 다 해결하고 집에 돌아올만큼 사람 좋아하는 밖순이건만. 황금같은 이틀의 주말을 정신없이 보내고 나면 피로가 잔뜩 쌓인채로 월요일을 맞이하기 일쑤였다. 어쩌다 약속이 없는 날은 묘한 패배감이 들기도 했다. 혼자 있는 시간에는 불안함마저 느꼈고, 누군가의 부름에 자주 밖으로 나갔다. 또 자주 의지하고 실망했다. 어쩐지 이런 삶이 반복된다면 나는 유일한 나를 영영 모른채 그저 둥둥 떠다니는 삶을 살다가 돌아갈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원한 것은 이것이 아니라는 마음의 소리를 듣고 무작정 티켓팅을 하고 난 후,  출발하는 날까지 지 두 계절이 남아있는 상태였다. 커뮤니티를 자주 들여다보며 정보를 모았고 또 자주 걸어다녔다. 출발하기 3주 전쯤에는 배낭을 메고 10km씩 걷는 연습도 했다. 나름 외적인 준비는 갖춰져갔으나 이놈의 마음이 문제였다. 주말조차 혼자 제대로 보내본 적 없으면서 장장 한 달 넘게 그것도 의지할 곳 없는 타국에서의 일상이 내게 과연 가능한걸까. 스스로 의심이 들었다. 마치 중요한 약속을 앞두고 몸에 잘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거울 앞에서 어색하게 서성거리는 기분으로 도착한 파리였다. 


  

그렇지만 파리 야경은 사무치게 예뻤음




  숙소는 순례길을 걷기 위해 파리로 들어온 순례자들이 종종 묵어간다는 쉐어하우스다. 주인은 오랜시간 파리에서 산 여인이었다. 그녀는 딱딱한 어조로 숙소를 소개해주고 자주 가던 마켓에서 총기난사 사고가 있었다며 어깨에 걸친 숄을 꽉 동여매며 온기없이 말했다. 이어지는 수다에 거리감이 느껴지던 파리가 한 여인의 삶의 터전과 일상으로 다가왔고 파리에 성큼 가까워지는 기분이 들었으나 총.. 총이라니.. 내일 새벽 일찍 기차를 타러 가야하는데 가뜩이나 위축된 마음에 찬바람이 쌩 불었다. 혹시나 빈 침대에 다른 순례자가 오지 않을까 기대했으나 오늘은 나뿐이라고 했다. 어제도 있었고, 내일도 있을거라는 순례자들이 왜 오늘은 없는지. 그렇게 '혼자 (잘) 지내보기' 미션을 하루 강제 달성해버렸다.



  새벽 일찍 바욘으로 향하는 기차를 타러 나섰다. 보통 바욘은 생장으로 가기 위해 거쳐가는 동네이지만 나는 하루 묵어가면서 근처 유명한 휴양지인 '비아리츠'에 다녀올 예정으로 게스트하우스를 찾았다. 신기하게 이곳도 내일은 투숙객이 있을거라고 했는데 오늘은 혼자라고 했다. 어제도 순례자들이 거쳐갔다고 덧붙이며 방을 혼자 편하게 써서 좋을거라는 말도 남겼다. 내 속도 모르고.. 어딜가도 맛있는 프랑스 음식을 먹으며 같이 호들갑 떨고 좋아해줄 사람이랑 함께라면 좋겠다는 생각은 사치일뿐.. 굳이 내손에 억지로 쥐어준 '혼자 (잘) 지내보기' 미션을 어떻게든 해내게 만드는 상황이 가혹하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양가감정이 든다. 








  바욘에서 버스를 타고 조금 이동하여 도착한 비아리츠. 휴양지답게 세컨하우스로 쓰이는 듯한 예쁜 집들이 해안가를 따라 늘어서 있고 집구경을 하며 걷다보니 어느새 마을의 끝에 다다랐다. 비가 추적추적 오는 평일이여서 그런지 관광객은 나뿐이어서 실컷 사진도 찍고 바닷바람에 우산도 한번 뒤집혀주고..





  등대에서 비아리츠 해변을 내려다보고 있자니 파리에서 이곳까지 혼자 온 스스로가 기특하다. 가기 직전 무서워서 포기할뻔한 순간에 용기내길 잘했다 싶다. 아는이 아무도 없는 낯선 땅이라니. 대학 입학 이후엔 그저 졸업, 그리고 바로 취업. 그리고 내가 원하던게 이거였는지 물어볼 틈이 있을 때마다 선택하게 된 당장의 돈벌이. 입학을 해내고, 졸업을 해내고, 또 취업을 해내고.. 숨돌리는 틈 사이에도 다음 스텝을 준비해야만 하는 일종의 순리라고 말하는 힘이 내 인생에서 꽤 컸다. 다른 사람들의 걸음에 맞춰가느라 혹은 뒤쳐질까봐 그 울타리 밖의 선택지가 있다는 건 생각해보지 않았다. 아니 생각할 수 없었다는 말이 좀 더 가깝겠다. 무엇이 나를 그렇게 순종하게 했는지 잘 모르겠다.


  출발부터 이곳까지 혼자 '해내야' 한다는 생각에 불안으로 점철진 며칠, 새삼 이 아름다운 풍경을 백퍼센트 즐기지 못하는 내 모습에 한심함이 차오르면서도 어쩐지 이 여행 끝에 조금이라도 달라져있을 내 모습을 기대해보게 된다. 힘든 인생 굳이 여행까지 '해내야' 하나? 싶을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드디어, 마음 깊은 곳에서 스스로 해내고 싶은 것이 생겼다. 등떠밀리듯 선택하지도 않고, 희미한 물음표조차 가지지 않은 채, 확실하고 명확하게 나의 힘으로 해보고 싶은 것. 바로 나의 목소리로 말하고 노래하는 것이다.


   혼자여서 불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다. 외로움을 느끼는 것도 당연한 감정이다. 왜냐면 나는 애초에 혼자 잘 지내본적이 없고 이 길에 오르면서야 겨우 혼자 있는 연습을 시작한 삐약삐약 병아리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그저 다치지 말고, 내 페이스대로 걸어보자.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야말로 가장 즐겁고 좋은일이나, 아주 자주 내 페이스를 잃고 헤매지 않았던가. 이미 나의 20대는 남을 따라가느라 가랑이가 여러번 찢어지고 아물고를 반복했던 터였다. 그러니까 이길을 걷는 동안만은 나만의 속도로 걸어보자. 나만의 노래를 부르자. 누구든 처음은 늘 어렵고 뚝딱거리기 마련이니까. 연습하는 시간이다. 여기서는 의무감 가득한 맏딸도 아니고 잘 해내고 인정받고 싶은 직장인도 아니고, 누구의 기대를 충족시켜주지 않아도 된다. 내가 놓치고 온건 뭘까? 나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졌으니 괜찮은 시작인 것 같다.






촉촉한 바욘.. 


  바욘에 머무는 하루 내내 비가 내렸다. 그도 괜찮은게 비와 꽤 잘어울리는 도시여서 그다지 행복하지만은 않은 마음을 도시에게 공감받는 기분이 들었달까. 그림을 파는 가게에 마음에 드는 그림이 있어 한참을 서성였는데 앞으로의 여정이 길기에 눈으로만 담아왔다. 



촉촉한 바욘에 반짝반짝 빛나던 그림 가게


  조금은 단단해진 마음으로 바욘 대성당에 들러 기도를 하고 내일을 준비하기로 했다. 드디어 내일이면 순례길의 시작인 생장에 들어가게 된다. 웅장하고도 낯선 풍경 속에도 익숙하게 흘러나오는 기도. "안전하게 즐겁게 다치지 않고 이 길을 걸을 수 있게 도와주세요. 이 길 끝에 내가 무엇을 느끼고 무엇을 가져갈지 모르겠지만 혼자서도 '잘' 지낼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두 손까지 꼭 모으자 어린아이 같은 순수한 기도가 나왔다. 마음도 털끝만큼이나마 여유로워지고 어쩐지 이 여정의 시작에 단단한 발판을 딛고 선 기분으로 성당을 둘러보던 중이었다. 


"Um.. Excuse Me."


여행을 시작한 이후로 처음으로 누가 말을 건넸다.





작가의 이전글 나의 노래를 부르자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