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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새로 Feb 19. 2024

급하면 먼저 가세요

저도 뒤따라 갈게요

날카로운 기계음이 반복된다. 귀에 꽂히는 자동차 경적소리에 정신이 들었다. 북한강에 비치는 윤슬이 아름다워 잠시 넋을 놓은 바람에 차의 속도가 조금 줄었던 모양이다. 길을 재촉하는 뒷 차의 부름에 서둘러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계절이 다시 바뀐다.


넓고 길게 펼쳐진 강줄기를 보고 있으면 마음이 참 편안하다. 창문을 내리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강변을 타고 오는 바람이 차 안으로 들어와 몸을 휘감는다. 서늘한 기운은 여전히 몸을 움츠려 들게 하지만, 3월을 앞둔 바람이 이제 차갑지만은 않다.


입술 틈을 벌리고 흉곽을 부풀리고 큰 숨으로 최대한 공기를 들이마신다. 가을바람에 나부끼던 낙엽의 기척과 향은 사라져 버렸지만 겨울 특유의 마른 냄새는 여전하다. 아직 썩지 못한 낙엽은 몸이 무거워 도로 한편을 무심하게 채우지만, 그 존재감을 알리며 고즈넉한 특유의 향을 연신 바람에 실어 보낸다.


강가를 점령한 대형 카페와 펜션들은 어느새 강가의 주인인 듯한 모습이다. 벌거벗겨진 군데군데의 상처로 말끔하지 못한 산의 모습이 안타깝지만, 사람들에게 강가에 자리한 거대한 구조물들은 더 이상 이질적이지만은 않다. 익숙해져 버린 탓이다.


이러다가 자연의 향이 빵냄새가 되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뭔가 주객이 바뀐 느낌.




글 쓰는 것을 좋아하기 시작한 건 중학생 때부터다. 여친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달라는 친구의 부탁을 들어준 것이 계기였다. 붓글씨를 오래 한 탓에 필체는 자신이 있었다. 학교 선생님보다 더 멋진 정자체를 쓸 수 있었고, 필체를 바꾸면 내 또래 여자애들보다 더 이쁜 글씨를 쓸 수 있었다. 일기를 계속 썼던 탓에 편지를 쓰는 것이 어렵지도 않았다.


늘 일기를 쓰시던 아버지의 영향이 컸다. 날마다 무언가를 적던 아버지를 보고 자연스럽게 나도 따라 적었다. 꼬마의 그림일기에서 차츰 그림은 사라 졌고, 날짜와 날씨를 적던 일기는 나만이 알 수 있는 비밀 노트로 모습을 바꿨다.


단어의 조합으로 문장을 만드는 것이 불편하지 않았다. 대부분이 푸념 섞인 하루의 기록이었지만 어쨌든 담임선생님께 제출하던 일기를 벗어난, 비로소 시작한 나만의 일기였다.


죽기 전에 재미있게 읽히는 소설 하나쯤은 쓰고 싶다는 막연한 꿈이 있다. 읽는 것에서 쓰는 것으로 관심이 확장되면서 브런치를 알게 됐다. 걷기만 해도 등줄기에 땀이 흐르던 무더위가 끝나갈 즈음이었다.


덜컥 글쓰기 자격을 얻었다. '작가'라는 빈 공간을 채우고 글쓰기를 클릭해 문장, 문단을 채워 넣었다. 떨리는 마음으로 발행을 누르자마자 도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바로 알람이 울렸다. 첫 `좋아요'에 이어 몇 개의 알람이 더 이어졌다.


`좋아요'의 복합적인 의미를 잘 몰랐을 때였던 그때는 그것이 마냥 벅차고 신기하기만 했다. 읽는 이가 있는 글을 쓰는 것도 일기만큼이나  즐거운 일이었다.




유독 눈이 많이 내린 겨울이 끝나간다. 온 대지를 얼리던 찬 바람은 제 일을 마치고, 새롭게 태어날 꽃을 시샘할 정도의 힘만 남겨 놓은 듯하다.


그 사이 칠십 개의 글을 이곳에 올렸다. 대부분이 하루에 대한 의미를 적은 글이다. 좋아요라는 품앗이를 해주시는 많은 님들의 응원에 힘이 났다. 공감이 주는 힘은 글을 쓰는 루틴에 큰 기폭제가 됐다.


그런데 브런치라는 플랫폼이 혼자서 쓰고 읽는 일기가 아닌 탓에 아무래도 숫자를 의식할 수밖에 없다. 꾸준한 글쓰기 연습에 있어 재미있는 동력이 되어 힘이 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부담이 되기도 했다. 강원국 교수님은 "내 글을 누군가 읽을 것이라고 기대하지 말라고" 말씀하셨는데, 이상하게도 내가 올린 글에는 발행이 되고 나면 좋아요가 달렸다. 의아했고 착각했다. 그리고 그것을 의식하기 시작했다.


편협하지 않고 무난하게 쓰려고 노력했는데 지금 와서 보니 자기 자랑에 빠진 부끄러운 글이 있는가 하면, 불쾌한 기분을 배설하며 썼던  더러운 글도 있었다. 읽기 쉬운 글을 좋은 글이라고 표현할 수 있다면 다행히 그런 글도 몇 개는 있었다. 반면에 작가님들은 어떤 글이든 늘 응원해 주셨다.


어느 작가님은 선플이 아닌 악플도 달아주셔야 글쓰기가 발전할 수 있다며 브런치의 순한 맛을 걱정하시는 글을 올리기도 했는데, 어찌 됐든 글을 정독해 주시고 생각을 나눠주시는 작가님의 댓글은 분명 글쓰기의 또 다른 즐거움이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방향을 잃었다. 쓰고 싶은 행위가 아닌, 써야만 하는 책임감이 되어 버렸다. 능동적으로 원한 책임감이 아니었으니 그 과정을 이겨내지 못했으리라.


글쓰기의 즐거움이었던 좋아요 때문이다. 목소리에 말투가 있듯이 문단에는 필체가 있다. 말이 빠른 사람이 있다면 느린 사람이 있고, 표준어를 쓰는 사람이 있다면 사투리를 쓰는 사람도 있다. 소리를 내는 의사전달 방식과 다를 수밖에 없는 이유로, 글을 통한 상상과 의사 전달은 그 범위가 무척 넓다. 당연히 글에도 생각과 위트가 담기기 마련이다. 그것이 목소리의 빠르기나 톤의 차이일 수도 있고, 트레이닝을 통한 학습효과일 수도 있다. 누구나 가지고 있는 습관처럼 당연히 내 글에도 나만의 말투가 있을 것이다.


그런데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르겠다. 길을 잃었다.


글을 쓰면 즐겁다. 쓰고 나면 편하다. 그것이 내가 글쓰기를 좋아하는 이유였다. 자문하고 자답하는 시간이 좋았다. 그 과정에서 얻는 생각들과 다짐을 딛고 성장했다. 알 수 없는 종점을 향해 치달리는 삶에서 잠시 멈출 수 있었다. 생각을 글로 옮기면서 나를 규정했고, 글로 적는 과정에서 깨닫는 생각이 나를 가르치기도 했다.


그런 글쓰기 취미가 강박이 되어 버렸다.

나는 글쓰기를 통해서 메신저 사업을 할 생각이 없다. 유명한 인플루언서가 되어 부유한 빈곤에서 벗어나야 하는 것도 아니다. 브런치스토리의 배지가 필요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이상했다. 취미가 재미있지 않았다. 취미는 즐거워야 하지 않을까.


다만 노출된 글을 쓴다는 것은 인식해야 한다. 별생각 없이 쓴 문장이 둔기가 되어 누군가를 공격할 수도 있고, 몇 개의 단어가 섞인 짧은 문장이 읽는 이에게 불쾌감을 심어 줄 수도 있으니 그런 것들은 조심해야 한다. 혼자 쓰는 일기가 아닌 이상 혼자서 큭큭되고 웃던 재미는 조금은 내려놓을 수밖에 없다.


그럼 됐다. 성숙할 수 있다. 나를 객관화하고 지혜를 배워나가면서 나이에 맞는 색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 즐거울 수 있다.


많은 선배님들이 다녀간 길을 이제 나도 진입하려나보다 하고 자위해 본다. 글을 읽고 쓰는 목적, 나아가 글을 통해 얻는 순수한 즐거움을 점층 시키려고 한다. 그러니 이제 조금은 더 재미있어지리라. 그렇게 다음 고개를 넘어가는 거라 여기며 기분 좋은 생각을 한다. 정답을 알고 있는 사춘기시절의 방황은 그만하고 브런치로 다시 돌아가야겠다.


고유한 색이 지니는 작가님들의 글을 읽는다. 린 작가님의 보드라운 말투 속 강한 힘의 문장들이 좋다. 다독과 다상에서 기반한 Bono 작가님의 뚜렷한 색채와 생각을 담은 사진과 글이 좋다. 대화하듯 일상을 속삭여주는 노사임당 작가님의 막힘없는 흐름과 표현이 좋다. james 아저씨 작가님의 본능적이고 존엄적인 사랑이 좋다.


그들의 문체가 좋다. 각자의 필체를 통해 전해지는 생각, 지식, 배려들이 좋다. 제각각의 이야기를 풀어가는 수많은 단상과 단편들이 있는 그곳으로 돌아가야겠다. 서둘러 가고자 하는 곳은 없다. 자동차 경적에 놀랄 필요도 없다. 마음에 공간을 만들 수 있으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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