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에서 살아서요
방향을 틀어 산으로 향했다. 갑자기 산을 뛰고 싶어졌다. 명절에 너무도 관대했던 스스로에게 긴장감을 주기 위해서지만, 막상 나와보니 날이, 볕이 무척 좋았다. 폰과 눈을 마주쳐 익숙한 화면을 켠다. 미세먼지가 궁금해 날씨앱을 불러오려다가 다시 버튼은 눌러 화면을 검게 만들었다. 미세먼지가 있다고 안 뛸 것도 아닌데, 그냥 뛰자. 내가 좀 들이마셔서 답답한 세상 정화라도 시켜주지 모.
후문을 나와 에어팟을 꼽고 속도를 올린다. 평지를 달리기는 것보다는 속도는 더디지만, 심장은 더 힘차게 뛴다. 정상 150m의 나지막한 산이지만 나름 숲이 우거진 곳이라 뛰는 맛이 좋고 왕복 6km 거리도 적당하다. 일주일 대부분을 사무실에서 잔잔하게 보내는 심장에게 자극도 필요하다. 심장판막이 있으니 터지진 않겠지. 뛰자. 심장아 좀 나대다오.
집에서 1km 거리에 있는 산은 장릉산이라고 불린다. 이순신 장군이 계셔서 왜놈에게는 나라를 빼앗기지 않았는데, 몇 해를 지나고는 결국 청나라에게 항복하고 신하가 되기로 한 그 시절의 임금 '인조'의 부모가 묻혀있는 산이다. 400년이 넘도록 그 무능한 가족들의 무덤에 국세를 투입하여 문화재로 지키고 있는, 그래서 도시에 자리한 산 치고는 제법 관리가 잘 되고 있는 산이다. 다만 무덤을 관리하는데 쓰는 세금을 차라리 산자를 위한 둘레길을 조성하는 데 쓰면 더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다.
무덤 앞에 이쁘게 자리한 작은 호수를 끼고 뛰기 시작했다. 건물들에게 자리를 뺏긴 여러 종류의 새들에게는 이곳이 안식처다. 높은 나무의 가지에 잘도 숨어 지들끼리 조잘조잘 시끄럽게 떠들어대는데 그 소리들이 참 듣기 좋다. 이해하지 못하는 지저귐에 대답을 안 해도 되기 때문인지, 아니면 산이 주는 청량함이 주는 편안함 때문인지는 모르겠다. 그도 아니면 알아 들지 못할 소리에 대답해도 되지 않아도 되는 편안함 때문일지도.
가끔 영상을 보면 새랑 대화를 한다는 사람이 나오긴 하던데 나에게 그런 능력은 없다. 그 소리를 알아듣는 게 더 이상한 거지. 새되는 거니까. 암튼 바쁘게 좌우 다리를 움직이며 그 알아들을 수 없는 소리에 집중하기 위해 귀에 꽂은 에어팟을 뺀다. 6km 정도의 거리를 오르고 내려와야 하니 다리에 무리가 가지 않아야 한다. 무게 중심을 발바닥에 고르게 나누어 달린다. 산을 뛸 때는 속도를 내는 단거리와 다르게 '미드풋 주법'이 어울린다. 앞 발바닥 전체가 땅에 닿으며 달려 나간다.
점심을 앞둔 2월의 산은 봄의 준비로 한창이다. 그동안 얼었던 땅은 조금씩 몸을 풀고 그동안 머금고 있던 습기를 땅으로 올려 보낸다. 성질이 급한 몇 녀석은 벌써 땅 위에 작지만, 분명한 색으로 연두 초록을 만들고 있다. 나는 아직 겨울의 연휴에 몸을 웅크리고 있던 참이었는데, 산은 이미 기지개를 시작했다. 자연한 산의 변화가 새삼 신비롭다.
얼었던 땅이 녹아 질퍽거리게 된 황토 진흙이 내 발목을 잡는다. 몇 번 미끄러지면서 자연스럽게 달리는 속도를 늦춘다. 신발이 진흙으로 더러워지는 것이 썩 반갑진 않지만, 이 자연함을 어찌하겠냐 라는 생각이 들자 이내 마음도 편해진다. 흙이야 묻으면 털어내면 되고, 더러워진 신발은 조금의 수고를 더하면 될 일이다. 그래도 한 마디를 잊지 않는다.
"에이 다 배린네"
뛰면서 힐링한다.
산을 뛰는 이유가 있다.
뛰면서 지나가는 경치가 산 정상에서 바라보는 경치에 비하지는 못하겠지만 달리기를 하며 얼굴 옆으로 지나가는 자동차와 오토바이, 전자 킥보드보다는 아름답다. 자연의 소리는 덤이다. 아무래도 건물들이 즐비한 곳에 살다 보니 흙보다는 포장도로를, 나무보다는 건물을, 초록색보다는 회색을 마주할 일이 많다. 게다가 하루 10시간 이상을 직장을 위해 써야 하는 내 입장에서는 주에 한두 번 달리는 시간은 꽤 소중하다. 러닝머신의 고무 위보다는 나무로 둘러 쌓인 산속의 흙이 좋고, 인공으로 만든 우레탄을 들고 내리면서 근육을 자극하는 것보다는 산을 뛰어오르며 다리를 단련하는 것이 좋다. 작은 산이지만, 언제고 선물을 주고 있다. 선택은 받는 이의 몫이다
직장인의 체력을 향상시키는 데 이만한 게 없다
등산을 하면 근육이 발달하고, 심폐 기능이 향상되어 체력이 좋아진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하루 5분 이 운동으로 만드는 복근', '몸짱으로 만들어 주는 하루 10분 운동?"과 같은 제목의 다양한 영상들이 올라온다. 다른 운동으로 이미 몸을 만든 사람들이 그 몸을 가지고 영상의 운동을 소개한다. 운동은 시간과 비례하는 것인데 하루 5분, 10분으로 영상 속 유튜버처럼 될 리가 없다. 가능하다면 고강도의 운동 시간을 최대한 많이 확보하는 것이 좋은데, 산을 달리는 것보다 좋은 것이 없다. 뛰다가 힘들면 걷게 되는데, 걷는다 하더라도 어차피 등산이다. 하체와 심폐기능을 올려주는 데 이만한 게 없다. 중력에 굴복한 엉덩이를 끌어올리는 데에도 그만이다. 달리는 것으로 이미 엉덩이 해방일지다.
OTT, 숏츠, 릴스 말고도 엔돌핀을 얻을 곳이 있다
직장인의 삶도 참 바쁜 일상이다. 원하는 일로 바쁜 것이 아니라는 게 흠이지만 능동적 쳇바퀴 속에서 그나마 안정을 얻을 수 있다. 직장인에게도 스트레스를 해소하는 호르몬인 엔돌핀이 필요한데 나는 산을 달리면서 엔돌핀을 대량으로 얻는다. 숏츠나 릴스의 1분 이내의 영상보다 빠르게 얻는 엔돌핀은 아니지만, 오히려 이를 얻기 위해 어느 정도의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기 때문에 그만큼 지속성이 높다. 산을 달리면 당연하게 힘이 들텐데, 아이러니하게도 몸과 마음은 그만큼 편안해진다. 물론 이를 느끼기 위해서는 어느 정도의 단련이 필요할 테지만, 그 수준이 결코 요원하지 않다. 거리와 속도는 내가 맞춘다. 서두를 필요가 없다.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기 시작하면 그 순간부터가 엔돌핀이 축적되기 시작한다. "이거 왜 사서 고생이야"라는 생각이 드는 바로 그때다. 사서 해야 하는 고생인 만큼 값어치가 있는 것이다. 산악 달리기는.
몸이 진짜로 좋아진다
산을 오르면 아무래도 심폐기능이 좋아진다. 혈액순환이 원활해지니 세포의 대사가 활발해져 면역력이 강화되는 것이다. 직장인의 영원한 동반자인 혈당, 혈압, 콜레스테롤 등과도 관련이 있는데 이런 기저질환 지표들은 마치 우리의 급여처럼 야금야금 아주 조금씩, 그러나 지속적으로 계속 오르기 마련이다. 산을 달리는 것은 이를 관리하는 데에도 탁월하다. 빠른 달리기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걷기 보다만 빠르게 이동할 수 있다면 관절과 근육도 상당 부분 강력해진다. '강력'이라는 단어가 다이소 같은 문구점에서 사는 접착제에만 쓰이는 단어가 아니다. 어울리지 않을 것만 같았던 나의 몸에도 '강력'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수 있다.
이런 성취감이라면 사장님의 마인드로 일할 수도 있어요
자연 안에서 달리면서 얻는 성취감의 질은 수준이 높다. 업무로 얻는 성취감과 결이 다르다. 타인이 만든 잣대와 평가로 만드는 성취감이 오래 지속될 리 없다. 스스로에게 이렇게 성취감을 제공해 주는 회사가 있다면, 사장이 아니더라도 사장의 마인드로 한번 일해볼 용의가 있다. 물론 사장의 급여를 준다면 더 좋겠지만.
빠르게 걷다가, 조금씩 짧은 구간을 뛰어 본다. 경사가 높은 구간에서는 속도를 줄이고 빠르게 걷는다. 과호흡은 위험하다. 그렇게 조금씩 빠르게 움직이다 보면 언제고 정상에 도달한다. 몸에 힘이 빠지고, 숨이 턱밑까지 차오르지만 결국은 도착하기 마련이다. 이마에 맺힌 작은 땀방울이 크기를 불려 이마와 볼을 타고 흐른다. 땀방울이 흐르며 전해지는 이질감이 볼을 간지럽힌다. 0.5배로 늦춘 재생속도의 영상처럼 그 찰나의 이질감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빠른 호흡과 나대는 심장과는 별개로 흐르는 시간의 반전이 황홀하다. 성취감을 통해 향상되는 자신감은 다른 사람에게 보이기 위함이 아니다. 오롯이 나를 위한 감정이다. 나에게 느끼는 자신감이다.
산을 달리면서 명상을 한다
일전에 명상 수업을 들은 적이 있다. 명상의 효과가 궁금했던 터라 몇 번 시도를 해봤는데, 효과도 얻은 것도 없었다. 명상이 결코 쉬운 것이 아니구나 느꼈던 수업이었다. 그런데 요즘 명상의 요점을 움직이는 데 사용하고 있다. 명상 수업에서 명상을 알려주신 강사님의 요지는 "머리를 쉬게 하라"였다. 무념(無念)과 무상(無想)을 통해서 뇌에게 휴식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나는 달리면서 명상한다. 속도를 올리면서 달리기 시작하면 아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힘든 일도, 즐거운 일도 그 시간만큼은 그냥 잊게 된다. 그냥 뛰게 된다. 낙엽을 밟으면서 미끄러지지 않으려 하고, 달리기를 하면서 흙과 돌을 구분해서 밟는다. 숨이 턱에 차면서도 귀에 들리는 자연의 지저귐은 그대로 받아들인다. 온갖 잡생각이 많아서 도저히 명상에 진입하기 어려웠던 나였지만 이제 자연스럽게 달리고, 몸을 쓰면서 머리에게 휴식을 제공한다. 명상을 한 건지, 명상이 된 건지 모르겠지만. 뭐 아무렴 어떤가? 마음에 휴식을 줬으면 됐지.
직장에서 지치고 상처 입은 몸과 마음을 달래려 산을 뛴다. 당연히 안전에 유의해야 한다. 지리산의 반달곰을 만나거나, 광양의 백운산에서 멧돼지를 만날 일은 없으니 나 스스로의 안전에만 유의하면 된다. 뛰는 것이 좋다 하지만 힘들면 적절하게 휴식을 취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체력과 컨디션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다만 내려올 걸 왜 올라가야 하는지, 걷는 것도 어려운 산을 왜 뛰어야 하는지만 스스로 설득이 된다면 산을 뛰는 것만큼의 즐거움을 얻을 수 있는 운동이 없음은 확언한다.
직장인들이여. 나에게 '강력'이라는 수식어를 한번 붙여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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