를 좋아하는 이유
세상을 등지고 능동적으로 고립된다.
사람으로부터는 떠나는 것이지만 자연으로는 들어가는 것이다.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격리하면서 세상과의 연결을 단절하는 그들의 용기가 참 부럽다. 그 결단력이 놀랍다.
대한민국의 중년 남자들이 가장 좋아한다는 TV 프로그램 <나는 자연인이다> 이야기다. 자연을 벗 삼아 유유자적, 그러나 매우 부지런하게 사는 그들의 모습이 재미있어 멍하니 보다가 아예 털썩 자리를 잡는다.
굳이 OTT를 이용하지 않아도 언제든지 시청이 가능하다. 재방송을 많이 하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실제로 TV를 보면 여기저기 채널을 바꿔가며 24시간 내내 방송되는 것 같다. 어느 한 채널에서는 꼭 자연인과 끼니를 해결하고 있는 윤택 씨나 이승윤 씨가 나온다.
자연을 담은 여러 종류의 음식들이 소개되기도 하고 이게 정말 자연인 식단이 맞나 싶을 정도의 탐스러운 먹방이 연출되기도 한다. 간혹 먹지 못할 듯 야생적인 음식이 나와 기겁을 하기도 하지만 자연인이 뚝딱하고 만들어 내는 음식들과 두툼한 손으로 보여주는 노련한 칼질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몸에 좋은 약초는 뭐가 그렇게 많은지 자연인의 뒷 산은 늘 약초로 가득하다. 미리 심어둔 건가 싶을 정도로 쑥쑥 원샷원킬이다. 계곡물을 가둔 곳에 송어를 키우기도 하고, 지인이 가져다줬다며 멧돼지를 구워 먹기도 한다. 과거에 미국에서 태권도 도장을 운영했다는 자연인은 외딴 무인도 섬에서 와인을 마시며 낭만을 즐기기도 하더라.
모두 저마다의 사연이 있다
잘 나가던 사업의 실패 같은 돈 문제부터 망가진 몸을 챙기기 위해 자연의 품으로 들어갔다는 이들도 있고, 사람을 피하기 위한 피난처로 산을 찾은 이들도 있다. 제 각각의 이유로 자연에 살고 있다. 많은 사연과 과거 그들의 책임감은 차치하고.
TV를 거의 보지 않는데 <나는 자연인이다>는 예외였다. 찾아서 볼 정도였다. 세상의 풍파에는 흔들리지 않지만, 자연의 풍파에는 순응하는 그들의 삶을 시샘했다. 독야청청하는 그들의 삶이 부러웠다. TV를 보면서 울고 웃었고, TV를 보며 나를 치유하고 토닥였다. 마음이 힘들수록 공감은 커져갔다.
'나 왜 이럼?'
격한 공감을 하고 있는 내 모습이 신기하게 느껴질 때면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져 있기도 했다.
중년 남성 가장의 최애 프로그램이라고도 하는데, 이를 즐겨보는 사람들의 이유가 대개는 비슷할 것이다.
내려놓고 싶다고 말하지만 쉽게 실행하지 못하는 현실의 아쉬움을 달래고, 인정받고 칭찬받기 위해 모든 것을 쏟아부어야만 하는 사회를 잠시나마 잊기 위함이 아닐까? 책임감과 마땅함을 내려놓은 자연인에게 통쾌한 대리만족을 느끼기도 하니까.
어둡고 긴 터널을 지나온 적이 있다. 길었던 시간만큼 마음이 다치는 건 어쩌지 못했다. 책을 읽어도, 하소연을 해도 나아지지 않았던 마음을 위로해 준건 <나는 자연인이다>였다. 늦은 회식을 마치고 들어온 집 거실 소파에 앉아 TV를 켜고 밤을 새운 적이 많았다. 잠시나마 자연인이 되어 산속을 돌아다녔다. 서울에서 나고 자란 탓에 자연에 무지한 나지만, TV 속에서는 걱정이 없었다. 자연인에 동화되어 현실을 도피했다. 무엇보다 그들의 외로움과 고독이 너무 좋았다. 사람들이 없는 곳에서도 혼자 살 수 있음을 증명하고 있는 그들을 응원했다.
긴 터널을 빠져나오면 빛이 세상을 비춘다. 어려움을 극복한 뒤의 햇빛은 유독 따사롭다. 어려울 때 도움을 줬던 친구를 잊으면 안 되는데, 망각과 배신의 아이콘인 사람에게 윤택 씨와 이승윤 씨는 자연스럽게 잊힌다. 가끔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히 만나기는 하지만 굳이 찾아 안부를 전할 정도는 아니다.
한동안 안정적인 심리 상태를 유지했다. 인간들의 이기심과 자기 합리화에 침묵하는 방법을 깨달은 후에는 사람으로 인한 상처에서 조금은 자유로워졌기 때문이다. <나는 자연인이다>를 찾는 빈도는 급감했다.
다시 자연인을 찾다
작년 처음으로 '퇴사'를 생각했다. 역시 사람이 문제였다. 맞지 않는 사람과 근무하게 되면서 그동안 중첩됐던 무게들이 한꺼번에 어깨를 눌러왔다. 이제는 버티기 싫었다.
그리고 우연히 TV에서 자연인과 대화하는 윤택 씨를 봤다. 이게 무슨 조화인지. 또다시 그렇게 <나는 자연인이다>를 가까이하게 됐다. 그리고 깨달았다. 윤택 씨나 이승윤 씨가 반갑다는 건 그만큼 마음에 염증이 심하다는 반증이다. 그러니까 나는 사람이 싫어질 때마다 자연인을 찾는 것이다. 회색도시를 떠나고 싶은 것이다. 나한테는 자연인이 오은영박사님이고 김창옥교수다. 예능이 다큐가 되고, 자연인이 신경정신과 교수로 변한다.
금쪽이도 세상의 착한 개들도 모두 <나는 자연인이다> 에서 파생된 프로그램인가 보다. 예능이 아니라 솔루션을 제공하는 다큐, 교육 방송이다.
근자는 마음이 평온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또다시 번아웃과 포기라는 단어가 떠오를 것이다. 아직은 삶이 그렇다. 현실에서 책임져야 할 의무들이 많다. 개인의 하루를 컨트롤할 수 있는 부분이 많지 않고 선택할 수 있는 옵션이 많지 않다. 멘털 부여잡고 계속해서 버틸 궁리를 해야한다. 힘들면 또 이겨내면 되니까.
포기하고 무대에서 사라지면 다시는 무대에 설 기회를 얻을 수 없다.
이기려고 애쓰지 마라.
버티는 데 집중해라. 버티면 힘이 붙는다.
힘이 붙으면 이긴다.
여기서 포기할 것인가? 를 대신해
'여기서 어떻게 더 버틸 것인가?를 생각하라.
그것이 현명한 사람의 선택이다.
보토 섀퍼 <멘탈의 연금술> 중에서
괜찮다. 버틸 수 있다. 수많은 자연인을 담은 재방송이 존재하는 한 버틸 수 있을 것이다. 대리만족이라는 꼼수를 쓰면 된다.
다만 자연인을 찾는 일이 많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좋아하는 프로그램이지만, 즐기는 일이 많지 않기를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