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새로 Nov 13. 2023

상대방 말 들어주기

11 day - 열한 살 아이에게 배움

엄마 아버지를 뵙고 왔다. 할머니, 할아버지가 보고 싶다는 초4 아들의 재촉-폰의 사용시간이 대폭 증가하는 이유-도 있었고, 추석 이후 부모님 댁에 다녀온 지도 좀 됐던 참이다. 주말엔 좀 쉬어야 하는 아내님과 딸은 집에 남긴 채 아들과 둘이 차에 올랐다.


토요일이라고 하지만 늦은 저녁인데 길에는 차가 많다. 기온이 조금 내려가긴 했지만, 가을 하늘의 깊은 푸르름은 여전히 아름답다. 집에서만 보기엔 확실히 아까운 하늘이다. 가을 공기를 만끽하고자 차 문을 내리고 달리고 싶지만, 야구 응원으로 목이 쉴 대로 쉬어 버린 탓에 가을 공기는 포기한다. 눈으로 즐기기에도 충분한 가을 오늘이다.


여행을 좋아하시는 부모님은 최근 차박을 즐기신다. 이틀 여행을 가시면 하루는 근처 인적 없는 곳에서 조용히 스텔라차박을 즐기시는 모양이다. 원래가 조금 예민하신 엄마가 차박을 편해할 리 없는데, 엄마와는 반대로 등만 대면 90도 좌석 비행기에서도 숙면을 취하시는 아버지는 차박이 너무 좋으시다. 다행히 엄마가, 아버지가 한 발씩 양보하면서 큰 마찰 없이 여행을 즐기고 계셨나보다 했다.


저녁 자리에서 두 분의 차박 이야기가 나왔다. 서로 한 발씩 양보하고 계신 줄 알았더니 그게 아니다. 서로 한 발이 아니라 몇 발을 양보하고 있으시다며 티격대격이시다. 다 큰 아들 녀석은 그런 두 분의 모습이 참 재미있다. 웃고 넘기려는데 대화가 조금 진행되면서 분위기가 사뭇 바뀐다. 5차전을 앞두고 있는 한국시리즈 같다. 중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바로 그때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상대방이 하는 얘기를 듣고 자꾸 자기 말만 하려고 하지 말고, 그냥 상대방 말을 듣고 인정해 주면 돼요. 그렇게 해도 저한테는 아무 손해도 없어요. 다툼도 나지 않고요."


참 머쓱하다.

재미있는 여행 얘기를 하다가 치열한 한국시리즈 분위기로 이어진 할머니, 할아버지도.

중재를 한답시고 두 분의 말을 자르려는 다 큰 아들 녀석도.


말을 마친 열한 살 아이는 제 할 일이던 폰 게임에 다시 집중한다. 이 녀석 시크하다.


잠시 머쓱하던 물리적 기준의 어른 셋은 이내 웃음을 터뜨렸다. 손자 녀석의 발칙한(?) 행동이 귀여워 죽겠는지 엄마는 초4 녀석에 쏜살같이 달려가 사탕이 세 개쯤은 들었을 듯한 도톰한 볼을 쓰다듬고 꼬집는다. 볼을 만지는 것으로는 부족하셨는지, 자리를 바꾸시고 제법 덩치가 커져버린 손자를 당신 무릎에 들어 올리신다.




귀가 두 개, 입이 한 개인 이유가 있다는데, 하나밖에 없는 입을 너무 많이 쓰며 살고 있다. 부서를 옮기면서 기획, 회의가 너무 많고, 교육 과정을 진행하고 강의를 해야 한다. 말을 해야 할 시간이 너무 많다.


말을 많이 하고 나서는 분명 마음이 편하지 않다. 아이패드를 사용하는 그림이나 글처럼 수정할 수도 없다. 말은 하면 할수록 손해라는 의미를 머리로는 분명히 알고 있다.


묵언수행까지는 아니더라도, 말을 대폭 줄여야겠다. 물을 마실 때를 제외하고는 입의 사용을 대폭 줄여야겠다. 먹는 것도, 말하는 것도. 입은 살을 부르고, 화를 부를 뿐이다.


공감의 문제는 그 성격이 다른 것이니 강요할 필요는 없다. 그냥 들어주고, 인정해 주면 될 뿐이다. 나에게 해가 될 것은 없다. 말을 하겠다고 부득부득 상대방의 말을 자름으로써 내게 돌아올 이득도 없다.


요즘 초4 저 녀석에게 많이 배운다.

매거진의 이전글 너무 잘 하려고 하지말고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