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day 우연이라는 행운
세상은 좀 불공평한 거 같다. 나에게만은 늘 관대했으면 좋겠는데, 그럴 리는 없다.
구매한 적이 많진 않지만, 로또 1등은 늘 남의 몫이다. 한국시리즈 직관 경기에서 터진 역전 투런 홈런볼이 내 자리 1m 옆으로 떨어졌다. 정선 카지노에 간 적이 있지만, 잭팟은 터지지 않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다행이다. 로또 1등에 당첨되면 좋기야 하겠지만, 앞으로 세잎클로버와 네잎클로버는 만나지 못할 거 같다. 내 바로 옆에서 박동원의 홈런볼을 주으려던 한 남성은 계단에서 넘어져 발목을 다쳤다. 역사적인 홈런볼을 잡지는 못했지만, 다치진 않았다. 잭팟에 터진 적이 없으니 욕심을 부려 마카오에 갈 일이 없다. 도박으로 돈을 벌 확률도 없지만, 돈을 잃을 확률 또한 제로다.
세상은 나에게 관대하다.
세상은 원래가 불합리하다. 사람들의 시작 점이 모두 제 각각이다. 시작점이 다른 데 어떻게 일원화된 결과를 좇으며 살 수 있겠는가. 어불성설이지. 세상이 제시하는 기준에 흔들리면 안 되는 이유다. 내가 가진 만원과 이재용 회장이 가지고 있는 만원의 가치는 분명 다를 수밖에 없다. 게다가 노력의 결과에는 우연이라는 비예측성도 상당 부분 존재한다. 노력한 만큼의 결과를 가져다주지 않을 때도 있고, 과분한 행운을 얻는 경우도 있다. 다행인 건 세상에는 나에게만 존재하는 우연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50년간 15만 명을 돌본 정신과 이근후 의사는 <백 살까지 유쾌하게 나이 드는 법>에 이렇게 적었다. "살아보니 인생은 필연보다 우연에 좌우되었고 세상은 생각보다 불합리하고 우스꽝스러운 곳이었다. 그래서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지만, 사소한 즐거움을 잃지 않는 한 인생은 무너지지 않는다."
필연이라는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과정에서 만났던 수많은 우연들은 결코 가벼운 행운들이 아니다. 유독 커 보이는 남의 떡 때문에 흔들릴 때도 있지만, 결국 내 삶을 만들고 지탱하는 건 반복되는 우연과 행운이다.
평가를 위한 고과와 승진급 같은 결과물이라는 필연을 만들기 위해 달렸던 과정들은 별로 기억에 남은 게 없다. 뚜렷한 여운도 없다. 해냈다는 성취감은 휘발성이 강했다. 결국 나를 지탱하는 건 쉼이라는 이름으로 만났던 수많은 우연들이었다. 준비라는 촉매제와 기대라는 스팩트럼을 거쳐 나를 찾아왔던 수많은 우연과 행운들.
간헐적 여행에서 만난 우연들을 여운이 깊은 감동을 선물한다. 오토바이를 타고 달렸던 태국에서의 10일, 스위스 리기산 정상에서 만났던 운무. 낯선 이국 해변에서 바라본 석양.
오늘은 또 어떤 우연함이 날 기다리고 있을까? 나는 오늘, 지금 이 순간을 여행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 모양이 아주 작은 우연스러운 행운이라 하더라도, 오늘은 꼭 마주하고 고맙다는 인사를 해야겠다.
마치 어바웃타임의 팀과 빌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