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 day 9호선 지옥철 출근하는 법
지하철 9호선은 서울 강서지역을 시작으로 여의도와 강남을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노선이다. 급행열차로 김포공항역에서 신논현역까지 34분이다. 아침 수면시간을 조금이라도 더 확보하고픈 이 나라 직장인들의 출근 전쟁이 가득한 곳이다.
복장
출근시간의 9호선은 위험하다. 사람은 물론이거니와 아끼는 가방, 신발, 외투는 늘 상처받는다. 밟히고, 처참히 변형된다. 특히 가장 아끼는 하얀색 ’나이키 권도 1 피스마이너스원‘ 이나 '나이키 덩크 하이'는 절대 사양이다.
행여 겨울을 맞이하여 한껏 기분을 낸 보드라운 ‘루즈 핏 울캐시미어 니트'를 꺼내 입거나 크리스마스 기분을 내기 위해 '빈티지 어글리 스웨터'를 입었다가는 큰 낭패를 보게 된다. 욕심을 내 꺼내 입은 '앙고라 나일론 원로그 겨울니트'는 가방 지퍼등에 긁혀 올이 나가기 일쑤니 출근길은 피하는 것이 좋다. 상처뿐인 영광이 아니라 그냥 상처만 남을 뿐. 집을 나올 때는 분명 샤방 스타일이었는데, 어느새 보헤미안 스타일이다. 출근은 마음만 꾸미고 간다. 복장은 전투복으로만.
자리 앉기
불가능하다. 과유불급. 욕심이 과하면 탈이 난다. 세 번 안에 지옥철을 보내지 않고 안으로 몸을 욱여넣을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중국 춘절의 기차를 상상하시라. 운이 좋아서 첫 지옥철 탑승에 실패하고 두 번째 지옥철 탑승에 성공하는 경우도 있지만 보통 두 대정도는 가벼운 마음으로 그냥 보낸다.
다만 급행열차의 시점인 김포공항역에서는 좌석을 확보할 수 있다. 기적이다. 우선 혼잡이 극을 이룬 가운데 라인을 버리고, 좌 우측을 공략한다. 성공이 가능한 마지노선은 세 번째 줄이다. 앞에 이미 세 사람 이상이 줄을 서고 있다면 과감하게 다음 지옥철을 노리는 것이 좋다. 과한 욕심으로 지옥철을 뛰어 들어가 봤자, 자리를 차지하지 못하고 다시 나와야 하는데 이 경우 줄을 다시 서야 하는 최악의 상황을 맞이할 수 있다.
앞에 두 명 정도라면 이제 필요한 건 지옥철 문이 열리고, 스타트 총성에 반응하는 순발력과 좌우 좌우 잔발스텝이다. (평소에 선호하는 좌석 가장자리는 지옥철 입석 사람들의 엉덩이와 가방에 두들겨 맞을 수 있기 때문에 가급적 지양하는 것을 추천) 거 아무리 그래도 좀. 임산부 석은 비워놓자. 교복 입은 사람도 임산부, 할머니도 임산부. 심지어 요즘은 남자 임산부도 많다.
입석 자리 차지하기
지옥철에 탑승했다고 해서 끝이 아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김포공항역 - 마곡나루역을 지나고부터는 바로 지하철은 지옥철로 변태 한다. 그런데 신기한 것은 역마다 계속해서 추가로 사람들이 탑승한다. 더는 안 될 거 같은 상황이지만, 사람이 또 다른 사람들을 밀어 넣는다.
입석도 우등석이 있다. 지옥철 출입문과 출입문 사이로 최대한 빠르게 이동해 좌석 앞 1열을 확보하거나, 출입문 반대편으로 달려가 등과 엉덩이를 밀착해 나만의 공간을 확보한다. 향후 진행되는 출입문이 계속 한 방향으로 열리기 때문에 등을 고정할 곳을 확보하면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밀리지 않을 수 있다. 그래도 이게 어디야. 지옥철에 탔으면 됐지. 지각은 아니잖아.
싸우기
일터로 향하는 출근시간은 물리 공격력과 방어력이 유독 높다. so 예민쓰다. 보통은 이틀에 한 번 꼴로 랜덤 전투가 열린다. 신진세력의 다소 강력한 밀어 넣기 공격을 받은 기성세력은 분노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지른다. 내가 의도한 공격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공격자도 분노하면서, 가해자가 없는 싸움이 열린다. 절정으로 치닫기도 한다. 성량 가득한 욕설이 에어팟을 뚫고 들어온다. 안타까운 아침이다. 이해는 하지만. 조금만 참아보자. 욕은 당신들이 하지만, 듣는 건 우리라고.
표정
무심코 고개를 든다. 사람들의 표정을 바라본다. 모두가 표정이 없다. 무표정. 모두 같은 모습이다. 자의지만, 원하지 않는 형태의 아침을 시작하는 출근길 사람들의 표정은 모두 같다. 폰을 보면서 잠시 웃는 순간을 제외하면 모두가 지쳐있다. 폰을 보는 사람도, 서서 잠을 청하는 사람도.
의식적으로 표정을 만들어 본다. 안면 근육을 움직인다. 조금 어색하지만 마스크 안 입술을 한껏 올려 본다. 광대승천을 시도한다. 모두가 힘든 시간이지만 조금은 의식적으로 웃어본다. 행복해서 웃나. 웃어서 행복한 거지.
간혹 키가 조금 작은 여성분이 덩치 큰 남자들 사이에 끼어 그들의 팔과 가방에 얼굴을 부딪히는 모습을 종종 본다. 지각은 피해야 하기 때문에 체면 불구하고 꽉 찬 지옥철에 몸을 밀어 넣으며 사람들의 안색을 찡그리게 만드는 사람들도 있다.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밀리고 구겨지면서 '이러다가 진짜 큰 사고 나겠다' 싶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꺼내기 싫은 단어....가 생각나기도 한다.
지옥철로 시작하는 하루가 즐거울 리 없다. 기대에 찬 하루일 수 없다. 한두 시간 일찍 출근하면 된다며 부지런함을 지적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좌석을 아예 없애버리겠다는 혜안(?) 어린 방법을 제시하는 대한민국 정부도 있다.
그런데 출근시간에 맞춰 집에서 나오고 싶은 이 시대 직장인들의 소박한 행복을 어느 누가 탓할 수 있겠는가. 집이 잠깐 잠만 자고 나오는 숙박 업소도 아니고.
세상에는 개인의 힘으로 감히 디자인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개선되지 않는 서울의 혼잡도가 그렇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메가 서울>을 만들겠다는 집단의 머릿속이 그렇고. 출근시간의 지옥철 혼잡도도 그렇다. 그러니 우리가 조금 의연하게 맞이해야겠다. 그래도 괜찮은 하루라고. 새로 시작하는 하루 시작이 조금 힘들지만, 그래도 즐거운 일이 일어날 거라고 주문하고 내 기분을 디자인하는 것이 좋을 거 같다.
지옥철의 사고를 위해 노력하시는 안전요원, 지옥철의 기관사님과 수많은 이용자들. 오늘의 출근 전쟁에 참전하는 모든 분들을 응원한다.
자자~ 오늘도 힘내보자. 누가 그랬다. 내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