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홍제동의 가수에게
가창력에 자부심이 있던 우리 아빠는 '가수가 따로 없네'라는 말을 참 좋아했다.
동창회 후모임으로 홍제동 노래방을 가면 그렇게도 아빠에게 마이크를 넘기고, 우리 아빠가 노래를 부르면 또 그렇게도 주변이 죽은 듯이 명곡을 감상했다고 한다. 노래 피날레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져나온다며 자랑하던 우리 아빠의 어린아이 같은 미소를 나는 정말로 좋아했다.
초등학생 때부터 그런 생각도 했다, 우리 아빠가 이 미소로 평생을 살았으면 좋겠다는.
2025년 9월 토요일 밤, '갓생' 한다며 일본어 가타카나를 써내려가던 그 순간이 화근이었다.
오랜만에 스마트폰으로 예능을 틀어놓은 채, 80년대 유명 가요를 음미하는 프로그램을 아무 생각 없이 들으며 샤프로 가타카나 [사 Sa]자를 쓰다가—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공감이 부족해', '리액션이 어색해', '눈과 입이 따로 놀아' 등 온갖 조롱을 듣던 내 인생에 '왈칵'은 웬만하면 없는데, 이때만큼은 그랬다.
아빠가 보고싶다.
해바라기, 송창식, 이선희, 뚜라미가 주름잡던 80년대. 우리 아빠는 한창 꿈 많은 청년, 예쁜 가정을 소망하는 청년이었겠지.
큰딸과 띠동갑인 막내딸을 둘 줄은 꿈에도 몰랐을 터. '딸 생각'은 커녕 여전히 동네 '톱티어' 가수라는 자부심이 가장의 무게를 견디게 해준 80년대의 연속이었겠지.
아빠가 보고싶다.
웃는 모습이 세상에서 제일 잘생긴 우리 아빠. 두꺼운 손가락이 성품을 대변할 것만 같던 우리 아빠. 여성으로 오해받을 이름으로 살았으면서도 세상 남자다웠던 우리 아빠. 그 급한 성격에도 신기하게 밥 한 술 한 술은 찬찬히 음미하던 우리 아빠.
병마로 마누라와 세 딸들이 더는 힘들지 않도록, 하늘나라로 일찍 가버린 우리 아빠.
내가 변호사가 되어야만 아빠가 행복할 것이라 오해했던 시기가 있었다.
내 형편과 힘에 부치는 공부를 하면서도 '아빠의 꿈을 이뤄줘야만 한다'며, 욕심인지 가능성인지 모를 터널을 지나던 때가 있었다. 한참 시간이 지나서야 알았다.
우리 아빠는 그냥 내가 행복하면 되는 것이었어.
그 순간, 막내가 떠올랐다.
그렇지, 늦둥이 막내는 아빠를 기억할 시간이 짧았지.
그렇다면 지금 그리워서 울고 있는 나는 추억 부자다. 그럼 내가 알려줘야지.
"귀요미야, 아빠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너무 궁금해하지 마.
아빠는 우리 막내가 행복하면, 그럼 되는 것이었어."
가타카나 연습을 하다 마주한 그리움이, 막내에게 전하고 싶은 사랑으로 바뀌는 순간.
80년대 서울 시내 노래방 어디선가, 아빠가 여전히 노래하고 있을 것만 같다. '가수가 따로 없네'라는 찬사를 받으며, 그 어린아이 미소를 머금은 채.
아빠, 나도 아빠가 행복하다면 그걸로 충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