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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현실몽혼 (現實夢魂)

현실과 꿈이 뒤섞여 영혼이 흔들리는 상태.

by 싱숭생숭

나는 분명 눈을 떴다.

천장이 있었다.

그러나 그 천장은 내가 알던 집의 색이 아니었다.

어제까지는 흰색이었는데 오늘은 서늘한 회색이었다.

붓자국이 반대 방향으로 남아 있었고,

균열은 어제보다 한 줄 더 많았다.

균열 사이로 숫자들이 흐려져 깜박였다.

28, 27, 26… 내려가는 숫자였는데, 나는 누워 있었다.

침대에서 엘리베이터 층수표시가 켜졌다 꺼지는 건 낯설었다.

나는 몸을 옆으로 굴렸다.

바닥은 장판이 아니라 카펫이었고,

카펫은 낯선 술 냄새를 품고 있었다.

테이블이 있었다. 둥글게 둘러앉은 어른들.

윤곽은 선명한데 표정은 비어 있었다.

하나같이 입술이 봉해져 있었지만 소리는 흘렀다.

왼쪽 끝에서 익숙한 목소리.

“이혼은 결혼보다 책임이 덜하지.”

입술은 움직이지 않았는데 목소리는 정확했다.

나는 의자를 끌어당겨 앉으려 했지만 의자 다리가 바닥에 붙어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내 목소리가 움직였다.

“아빠, 알아요. 엄마도,

아빠도 얼마나 진심으로 괴로웠는지 알아요.

그런데 이혼이 책임감이 덜하다구요?

그럼 남겨진 나는요? 내 감정은요?

나도 똑같이 무너졌는데,

왜 그건 책임으로 보지 않는 거예요?“

말이 공기를 지나 테이블 중앙의 빈 잔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잔은 소리를 삼키고 바닥으로 스며들었다.

그러나 아빠는 태연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의 얼굴은 냉정했고,

그의 마음에는 이미 확신이 깔려 있었다.

그에게 이혼은 단지 벗어나는 출구였지,

남겨진 사람들의 무게를 짊어져야 할 책임은 아니었다.

그는 끝내 스스로를 가장 불쌍한 사람이라고 믿고 있었다.​

나는 속으로 되뇌었다.

“아빠... 아니지? 아빠도 나처럼 생각이 너무 많았잖아.

아빠도 블로그 글 세 편에,

복잡한 내면을 그대로 써놨잖아.

그 문장들을 읽고, 나도 용기내 다가가본 건데...

아니지?... 아니지?... 아니라고 말해줘.. ”

하지만 내 눈앞에 남은 건, 차갑게 굳은 얼굴뿐이었다.

주변의 어른들은 끝내 침묵했고,

그 침묵 속의 시선은 냉소적으로 나를 짓눌렀다.

그 시선은 내 절규를 조롱하듯 차갑게 스며들었고,

나는 그 아래에서 점점 작아졌다.​

결국 나는 도망쳤다.

늦은 새벽,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려는 순간 두 친고모들이 들어왔다.

아빠가 도망친 나를 잡으러 온 줄 알았는데 아니었다.

숨을 헐떡이며 나를 보더니 말했다.

“드디어 빠져나왔네..”

한 고모가 다른 고모에게 말했다.

“나중에 밥 한 번 사라. 내가 너 계속 잡혀 있을거 구해준거야.”

그리고선 나를 쳐다보며 이렇게 말했다.

“드디어 알았지? 이제서야 네 아버지의 이면을 직접 본 거야.”

위로보단 현실을 내게 알려주었다. 그럼에도 나는 아빠의 자식이기에 무언가 조심스러운 모습이 있었다.​

나는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삼촌도 아빠처럼 고집이 세요?”

고모는 씁쓸하게 고개를 저었다.

“삼촌은 새 발의 피지.

네 아빠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야.”

한 고집 하는 삼촌이 아빠에 비해선 아니었다니.

​그 대답을 듣고 나는 깨달았다.

고모들도 이 남매 관계 속에서 오래 숨 막히며 살아왔다는 것을.

나만이 아니라,

그들 역시 같은 고통을 견뎌왔다는 것을.

엘리베이터는 위로도 아래로도 가지 않았다.

문만 닫혔다.

고모의 대답은 엘리베이터의 천장등처럼 깜박이며 떨어졌다.

그때쯤 목에 무언가가 스쳤다.

무엇인지 확인할 틈도 없이 숨이 하나 둘 짧아졌다.

시야가 어두워졌다. 어둠은 마치 물처럼 천천히 차올랐다.


다시 눈을 떴다.

천장.

이번엔 확실히 내 방.

커튼 사이로 들어오는 빛.

빛은 따뜻하지 않았다.

희석된 물감처럼 벽을 타고 바닥에서 번졌다.

바닥에 손을 대자 손금 사이로 아주 미세한 가루가 스며드는 느낌.

비누로 씻어도 남는 그 촉감.

나는 숨을 고르며 몸을 일으켰다.

팔꿈치가 책상 모서리를 더듬었다.

책상 위에는 노트가 수북했다.

페이지들은 바람도 없는데 스스로 넘겨졌다.

글자들이 내 손보다 빨랐다.

손가락은 내 것인데, 속도는 타인의 것이었다.

어느 순간, 내가 쓴 문장을 내가 처음 보는 사람처럼 읽고 있었다.

글자 사이사이로 어젯밤의 테이블,

닫히는 엘리베이터 문, 고모의 입술 모양이 흘렀다.


버스. 지하철. 사람들.

낮은 낮의 규칙대로 움직였지만,

내 안의 시계는 밤의 규칙으로 달리고 있었다.

정류장을 지났는데, 정류장이 아니라 환승역 같았다.

그런데 그 환승은 현실의 교통이 아니라,

꿈에서 꿈으로 건너가는 환승이었다.

나는 속도를 더했지만 결과는 가벼워졌고,

쌓인 노트는 많을수록 더욱 비어 보였다.

사람들은 말했다.

“대단하다.” “열심히 한다.” “집중력 좋다.”

그 말들은 내 어깨 위에 얕게 붙었다가 금세 떨어졌다.

떨어질 때마다 얇은 껍질이 벗겨지듯 피부 표면이 따끔거렸다.

나는 속도를 계속해서 더했다.

속도가 빨라질수록 결과는 가벼워졌다.

가벼워진 결과가 손바닥에서 미끄러졌다.

잡으려는 동안 노트는 더 많이 쌓였다.

쌓여 있을수록 더욱 비어 보였다.


깜빡.

눈이 깜박이는 동안 하루가 비었다.

처방받은 약봉지의 작은 칸 하나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칸이 내 몸보다 더 크다고 느꼈다.

칸이 빈 날의 공기는 밀도가 달랐다.

말끝이 공중에서 부서져 낱개로 떨어졌다.

말들은 잘 섞이지 않았다.

’의지‘라는 단어를 꺼내 입에 올리면,

말은 혀에서 녹아 물처럼 흘렀다.

녹아내린 단어가 목젖을 지나 내려갈 때,

속에서 작은 소용돌이가 일었다.

나는 달력을 가만히 보았다.

숫자들은 그 자리에 있었지만 순서는 어긋났다.

순서가 어긋난 날엔 문도 종종 반대 방향으로 열렸다.

밀어야 할 문을 잡아당기고, 잡아당겨야 할 문을 민다.

손잡이는 내 체온을 가져가고, 금속은 미세한 한기를 돌려준다.

그 한기가 손목으로, 팔꿈치로, 어깨 쪽으로 오르는 동안, 생각은 내려갔다.

밤이 되자 창이 거울이 되었다.

바깥은 사라지고 방 안이 두 배로 늘어났다.

거울 속의 나는 나와 정확히 맞지 않았다.

눈높이도, 어깨선도, 호흡의 간격도 미세하게 어긋났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면 거울 속의 나는 아주 조금 늦게 고개를 끄덕였다.

늦은 고개가 내 고개를 추월해 먼저 멈췄다.

그 순간, 어딘가에서 또렷한 역 안내가 들렸다.

“이번 역은—책임—다음 역은—”

기계음에 어떤 목소리가 겹쳐졌다.

어릴 적 듣던 낮은 공명. 나는 귀를 막았다.

막은 귀 안쪽에서 더 크게 들렸다.

나는 거울에 가까이 다가갔다.

거울 표면의 차가움이 이마에 닿았다.

이마의 열이 거울로 넘어가는 동안,

거울 속의 나는 내 입 모양과 다른 말을 했다.

“드디어 빠져나왔네.”

나는 고개를 저었다.

“밥 사.”

나는 한 발짝 물러났다.

“새 발의 피지.”

거울 속 입술의 움직임이 내 것보다 매끄러웠다.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눌린 버튼은 불이 들어오지 않았다.

대신 숫자판 전체가 한 번에 빛났다.

모든 층수에 동시에 불이 들어오면,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그리고선 문이 열렸다.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들어가지 않았다.

대신 계단을 택했다.

계단은 위로 올라가는 것 같았는데,

올라갈수록 더 아래층의 냄새가 났다.

먼지, 오래된 나무, 낯선 사람들의 어제.

손잡이에 손을 올리자 금속 냄새가 났다.

손을 뗐는데도 냄새는 손바닥에 남았다.

나는 계단을 돌았지만 제자리였다.

남은 건 냄새뿐이었다.


다시 방. 다시 테이블.

사람들이 둘러앉았다.

이번에는 어른들의 얼굴이 조금 더 선명했다.

선명할수록 내가 아는 얼굴에서 멀어졌다.

아빠의 얼굴은 눈가에 낯선 주름길을 달고 있었다.

눈가의 주름 사이로 흘러가는 무언가가 언어를 대신했다. 나는 그 사이를 읽지 못했다.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문장들로 방이 가득 차는 동안,

내 목소리는 점점 작아졌다.

“그럼 남겨진 건요.”

내 문장은 컵받침 밑으로 흘렀다.

컵받침은 젖었지만 컵은 마르지 않았다.

순간 나는 갑자기 살결에 닿는 거친 섬유를 느꼈다.

밧줄일 수도 있고,

스웨터의 오래된 목 부분일 수도 있었다.

그 촉감은 이름을 가지는 순간 사라졌다.

나는 이름을 붙이지 않으려 했다.

이름이 없어야 오래 남는 것들이 있다.

오래 남으면 위치가 된다.

위치가 되면 다시 돌아올 수 있다.

돌아오고 싶지 않은데, 자꾸 돌아온다.

돌아오는 길목마다 누군가의 발자국이 겹쳐져 있었다.

내 것인지 아닌지 구분되지 않았다.

구분하려 하면 모양이 흐려졌다.


어느새 버스 안이었다.

창밖으로 새벽의 가로등이 반복해서 지나갔다.

균일한 간격으로. 나는 노트를 펼쳤다.

손은 저절로 글자를 만들었다.

글자를 따라가다 보니, 글자 사이에 틈이 있었다.

틈 사이로 알약 하나가 굴러들어 왔다.

나는 손바닥을 펴 틈에서 떨어지는 것을 받았다.

알약의 표면은 매끈했고, 가운데 얕은 홈이 있었다.

나는 혀로 그 홈을 느꼈다. 짧게 씹히는 소리가 날 것 같았다.

그러나 씹지 않았다. 물을 찾았다.

물병은 비어 있었다.

비어 있는 물병에서 나는 목을 축였다.

축였다고 느끼는 동안,

실제로는 아무것도 삼키지 않았다.

버스의 진동이 내 목 안쪽의 건조함을 흔들었다.

흔들릴수록 목이 젖는 착각이 강해졌다.

또다시 들리는 역 안내음.

“이번 역은—침묵— 다음 역은—”

사람들이 웃었다. 아무도 웃지 않았는데 웃음이 있었다.

웃음은 소리가 아니고, 공기의 떨림이었다.

허벅지는 떨림을 기억했다.

내가 내린 역은 내릴 계획이 없던 역이었다.

발이 먼저 내렸고, 몸이 따라 나왔다.

지하철 바람의 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철, 먼지, 빛이 빠르게 지나가는 소리.

소리는 눈으로도 보였다.

긴 터널의 끝에서 작은 불이 켜졌다 꺼졌다.

불은 내 걸음과 비슷한 속도로 움직였다.

불을 따라가면 불이 멈췄다.

내가 멈추면 불이 다시 움직였다.

나는 한동안 그 불과 밀당을 했다.

불이 먼저 지쳤다. 꺼졌다.

꺼진 자리에서 아주 작고 얇은 소리가 났다.

누군가의 속삭임 같았지만,

사실은 내 신발 밑의 모래가 갈리는 소리였다.


집으로 돌아왔다. 문을 열었다.

손잡이는 여전히 차가웠다.

방 안의 공기가 낮게 눌려 있었다.

눌린 공기는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손으로 공기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손이 지쳤다.

창문을 열었다.

바람이 들어올 줄 알았는데, 바람은 밖으로 나갔다.

방 안의 바람이 먼저 나갔다.

바깥의 바람은 한참 뒤에 들어왔다.

그 사이에 방은 빈 창고처럼 머물렀다.

빈 공간에는 소리가 잘 울렸다. 작은 기침 한 번이 방의 사방을 돌아 내 귀로 돌아왔다.

나는 내 기침을 낯설어했다.

책상 앞에 앉아 거울을 봤다.

거울은 오늘따라 유리보다 더 깊었다. 깊은 물처럼.

얼굴이 표면에 닿자 표면이 흔들리고,

물결이 턱선과 광대, 눈썹으로 번졌다.

흔들린 내 얼굴이 정돈되기도 전에,

거울 저편에서 또 다른 얼굴이 올라왔다.

내가 잘 알던 얼굴. 어릴 때의 나.

그 아이는 말없이 입술을 달싹였다.

소리는 없었지만 문장은 보였다.

그 문장은, 내가 오래전 잊은 손글씨의 모양이었다.

나는 침대에 누웠다. 누우면서도 일어나는 느낌을 받았다.

누운 척을 하는 쪽과,

진짜로 누운 쪽이 동시에 존재했다.

눈을 감았다. 눈꺼풀 안쪽에 복도가 펼쳐졌다.

복도는 일직선 같았지만 몇 걸음 뒤면 원을 그렸다.

원을 걸어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왔을 때,

바닥의 무늬는 아주 조금 달랐다.

비슷하지만 달랐다.

그 ‘조금’이 하루였다.

그 ‘조금’이 날을 바꿨다.

나는 그 ‘조금’을 오래, 길게 들여다보았다.

들여다볼수록 더 작은 차이가 보였다.

더 작은 차이들을 모아 두면, 언젠가 큰 차이가 될까?라는 질문이 목 뒤까지 올라왔다가 다시 내려갔다.

그때 다시, 엘리베이터의 ‘딩’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몸을 일으켜 문 앞에 섰다.

문은 눈동자처럼 천천히 열렸다.

그 안에는 아무도 없었다.

바닥의 숫자판이 나를 봤다.

숫자들이 동시에 켜졌다가 동시에 꺼졌다.

켜짐과 꺼짐 사이에 아주 짧은 어둠.

그 어둠 속에서 누가 말했다.

“오늘은 여기까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는지,

끄덕였다고 믿었는지 알 수 없었다.


눈을 감았다.

눈을 떴다.

같은 방. 같은 천장. 다른 색. 다른 균열.

나는 손을 들어 균열을 세었다. 하나, 둘, 셋…

숫자가 커질수록 숨은 짧아졌다.

숫자가 커질수록 마음은 느려졌다.

느려진 마음이 바닥에 앉았다.

나는 그 옆에 같이 앉았다.

창밖의 불빛이 다시 순번을 정했다.

꺼질 때마다 켜지고, 켜질 때마다 꺼졌다.

나는 그 간격을 손톱으로 잰다.

손톱 밑에 검은 얼룩이 조금 묻어났다.

닦아도 남는 얼룩.

남아 있어야 돌아올 수 있는 표식.

나는 그 표식을 문 옆에 작게 그려 둔다.

아무도 모를 만큼 작게.

내일 이 문이 오늘의 문이 아닐 때를 대비해.

그리고, 아주 천천히 숨을 쉰다.

숨이 드나드는 동안, 방의 형태가 조금씩 바뀐다.

바뀌는 만큼만 내가 바뀐다.

바뀌어도 여전한 부분이 있다.

그 여전함이, 내가 다시 깨어날 자리를 남겨 둔다.

나는 눈을 감는다.

어쩌면 지금부터가 꿈이고,

어쩌면 방금까지가 꿈이었고,

어쩌면 그 둘은 서로의 그림자였을 것이다.

정답은 없다.

불빛만 꺼졌다 켜졌다.

내 호흡처럼, 방의 숨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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