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스로 안에서의 혼란.
어떤 날은 시작이 없었다.
눈을 뜨면 이미 낮은 흘러 있었고,
하루의 절반은 잘려 나간 채 흩어져 있었다.
알람이 울렸는지조차 알 수 없었고,
시간은 내가 눈을 뜨기도 전에 지나가 버렸다.
시작이라고 부를 만한 문장은 오지 않았고,
나는 잘려나간 장면 속에서 어설픈 얼굴을 걸친 채 앉아 있었다.
겉으로는 멀쩡했으나 그 멀쩡함은 오래된 가면극의 인형처럼 부자연스러웠다.
얼굴은 살아 있는 듯 보였으나,
안쪽에서는 균열의 소리가 쉼 없이 울렸다.
벽이 무너지는 굉음이 아니라,
벽 틈에 갇힌 먼지가 끝없이 흩날리는 소리.
그 소리는 누구도 듣지 못했지만,
나만은 분명히 들을 수 있었다.
들을수록 폐는 묵직해졌고,
나는 내 안의 무너짐을 혼자 감당했다.
누군가의 안부가 내게 닿을 때면 그 말은 작은 자갈처럼 어깨에 얹혔다.
처음엔 가볍게 느껴졌으나,
자갈은 쌓였고 돌무더기가 되었고 결국 낙석이 되어 굴러 내렸다.
부딪히지 않았는데도 내 안은 오래 진동했다.
그 진동은 내 안의 단어들을 모두 무너뜨렸다.
하나의 문장을 끝맺을 수 없었고,
자음과 모음의 파편만 삼켜야 했다.
삼켜도 삼켜도 남는 서걱거림이 하루 내내 내 안에 남았다.
나는 파편을 삼키며 연명했으나,
그 연명은 곧 허무였다.
낯선 시선과 불편한 문장을 좋아하던 내가 있었다.
낯선 말은 나를 자극했고,
그 불편을 견디는 동안 세상이 조금은 더 선명해진다고 믿었다.
그 믿음은 나를 사람들 속으로 다시 데려갔으나,
문제는 늘 몸이었다.
받아들이고 싶다는 의지는 남아 있었지만,
몸은 그전에 꺼졌다.
입술은 닫혔고, 혀는 미세하게 떨리다 굳었으며,
폐는 공기를 삼켰으나 곧바로 증발해 버렸다.
의지는 있었지만, 옮길 힘이 없었다.
힘없는 의지는 구호처럼 공중을 맴돌다 사라졌다.
나는 귀를 닫은 것이 아니었고,
내가 듣고 싶은 말만 고른 것도 아니었으나,
두 손이 텅 빈 채로는 그 어느 것도 붙잡을 수 없었다.
그 무력의 감각을 설명하기 위해 나는 오래도록 이미지를 붙잡았다.
그중 가장 오래 매달린 것은 냉장고 안의 작은 촛불이었다.
촛불은 원래 따뜻해야 했다.
어둠을 밝히고 손을 데우는 불꽃이어야 했다.
그러나 나는 그 불꽃을 냉장고 속에 넣었다.
꺼지지 않기 위해서.
바람을 피하기 위해서.
밀폐된 공기는 바람을 차단했으나 동시에 내 폐를 얼렸다.
성에가 벽을 뒤덮고, 불꽃은 흔들리며 약해졌다.
촛농은 보이지 않을 만큼 느리게 흘렀고,
그 느림이 가장 차갑고 가장 깊은 흔적을 남겼다.
살아남기 위한 선택이 살아 있다는 증거를 하나씩 앗아갔다.
살아남는 일과 살아 있는 일은 달랐고,
나는 전자에 매달린 채 후자를 잃어가고 있었다.
나는 혀가 굳는 밤들을 기억한다.
단어는 목구멍 끝까지 차올랐으나 끝내 소리가 되지 못한 채 심장 가까이에 엉겨 붙었다.
심장은 언어의 무덤이었고, 말들은 그 속에서 썩어갔다.
폐는 공기를 들이마셨으나 피와 섞이지 못했고,
호흡은 불안정했다.
나는 그 틈에서 흔들렸고, 흔들림이 내 전부였다.
그럴 때 내가 할 수 있는 건 가면을 하나 더 덧대는 일이었다.
웃음 위에 웃음을,
표정 위에 표정을,
목소리 위에 낯선 억양을 덧입히는 일.
나는 묻는다.
이것은 가식인가, 생존인가.
그러나 곧 알게 된다.
둘 사이의 차이는 지금 내게 아무 의미도 없음을.
가면은 내 솔직함과 부딪혔고,
그 충돌로 내 심장은 흔들렸다.
촛불을 지키려는 목소리와 가면을 보수하려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동시에 나를 죄어왔다.
나는 그 중간에서 스스로를 설득하기보다,
스스로를 분열시키는 데 더 많은 힘을 썼다.
결국 나는 작은 구멍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완전히 열려 있는 문도,
거대한 창문도 아닌 아주 미세한 틈새.
금이 간 유리의 가느다란 선,
닫힌 문 아래로 스며드는 바람,
벽과 벽이 완벽히 맞물리지 못해 남긴 균열.
그 작은 틈으로 스며드는 공기가 내 호흡의 전부였다.
구멍은 나를 구하지 않았다. 다만 더 늦게 무너뜨렸다.
나는 그 늦춤에 매달렸다.
변화가 아니라 지속,
회복이 아니라 연명.
조금 더 늦게 무너지는 방식.
그것이 내 생존의 다른 이름이었다.
나는 흙탕물을 떠올린다.
사람들은 시간이 지나면 흙탕물도 언젠가 맑아진다고 말했다.
그러나 내 흙탕물은 달랐다. 휘저을수록 더 진해졌다.
흙은 가라앉지 않았고, 물 전체로 번져 결을 바꾸었다.
맑아지려는 시도는 오히려 물을 더 어둡게 만들었다.
그래서 나는 멈췄다.
멈춤은 포기가 아니었다.
더 나빠지지 않기 위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멈췄다고 흙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흙은 여전히 떠 있었고,
나는 흐려진 시야로 하루를 버텼다.
나는 같은 은유를 반복한다.
촛불, 가면, 구멍, 흙탕물.
왜 늘 같은가 묻는다면 나는 답할 수 있다.
반복은 도망이 아니라, 재학습이다.
매번 같은 은유를 지나면서도 매번 조금씩 다른 파열을 겪었다.
촛불은 어떤 날엔 꺼져가는 불꽃이었고,
다른 날엔 나를 얼려버리는 냉기였다.
가면은 어떤 날엔 허위였고,
다른 날엔 내 진심을 몰래 실어 나르는 운반체였다.
구멍은 어떤 날엔 호흡이었고,
다른 날엔 더 깊은 어둠의 균열이었다.
흙탕물은 어떤 날엔 탁함이었고,
다른 날엔 내 눈을 가리는 장막이었다.
밖에서 보기에 미세한 차이였지만,
내 안에서는 거대한 차이였다.
나는 그 체감을 붙잡는다.
그 붙잡음이야말로 허무 속에서도 쓰러지지 않은 이유였다.
나는 결국 나 자신을 완전히 맑아지지 않는 강물로밖에 부를 수 없다.
오늘도 흐리고, 내일도 흐릴 것이다.
그러나 흐림 속에서도 강은 강으로서 흐른다.
강은 언젠가 바다에 닿겠지만,
그 바다는 더 탁할 수도 있다.
나는 그 가능성까지도 떠안아야 했다.
탁한 물살은 나를 흔들었고,
흔들림은 나를 쓰러뜨렸지만,
그 쓰러짐마저 강의 일부였다.
흐르는 동안 나는 구멍을 찾았다.
균열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금이 간 벽을 통해 들어오는 공기.
그 바람은 나를 구하지 않았으나,
나를 완전히 버리지도 않았다.
나는 그 불안정한 지속 위에서 숨을 이어갔다.
오늘도 흔들린다.
심장은 박자를 잃고,
호흡은 길게 끊겼다가 짧게 꺾인다.
말은 떠올랐다가 가라앉고,
생각은 균열 사이로 흩어진다.
그러나 흔들림은 죄가 아니었다.
그것은 허무와 혼란, 불안정 속에서도 내가 아직 남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래서 나는 기록한다.
기록된 흔들림은 더 이상 지워지지 않고,
언젠가 또 다른 균열에 스며들지도 모른다.
그것이 울림일지, 더 깊은 어둠일지는 알 수 없다.
다만, 흔들리면서도 남아 있다는 사실.
그 사실이야말로 내일을 사유할 수 있는 시작이 될 수 있음을, 나는 어렴풋이 느낀다.
밤은 차갑게 가라앉았다.
창밖의 가로등 불빛은 일정한 간격으로 깜박였고,
그 불규칙한 떨림은 내 심장의 어긋난 박자와 겹쳐졌다.
방 안은 조용했으나,
정적 속에서 오히려 더 크게 울리는 소리가 있었다.
그것은 외부의 소리가 아니라,
내 안쪽에서 금이 가며 울리는 균열의 진동이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왜 아직도 여기에 남아 있는가.”
대답은 오지 않았다.
그러나 그 침묵조차도 내 고독의 일부였다.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속에서,
나는 끝내 혼자일 수밖에 없음을,
그리고 그 혼자임이 곧 나의 시작일 수 있음을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