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기에 대하여 (w/ 박어깨 작가님)
아기 시절의 나는 품에서 떼어내기만 하면 울어서 어른들이 힘들어했다고 한다. 1년을 꼬박 넘게 잠과 투정의 전쟁을 치르고 나서 시간이 조금 더 지나고는 말을 떼고 글을 읽기 시작하고부터 거짓말처럼 조용해져서 그 때부터는 힘들지 않았다고 했다. 엄마는 내가 뜨문뜨문 글을 읽을 줄 아는 걸 알아채자마자 아파트 단지에 일주일에 한 번 정도 오는 움직이는 도서관(아주 큰 버스에 책을 가득 싣고 온다)에 데려가서 손에 들 수 있는 최대한의 책을 빌려왔다. 엄마는 나를 거실에 앉히고 “엄마 이제부터 일 할 테니까 책 읽고 있어.”라고 말하고 내가 책을 다 읽기 전까지 재빠르게 일을 했다고 한다.
말도 글도 빨리 뗀 편이라 엄마는 내가 영재인 줄 알았다고 했지만 엄마의 바람과 기대는 아주 천천히 부서졌다. 20년이 훌쩍 지난 지금, 두 개의 학과를 전전하다가 마침내 국문과에 진학하고 문예창작을 배우고 졸업까지 마쳤으니 영재는 아닐지라도 잘하는 걸 인정받은 셈일지도 모르겠다. 글은 내 뿌리부터 가지 끝까지 뻗어있는 물줄기다. 인류사적으로 봤을 때 그림이나 음악(소리)가 아닌 글이 뿌리에 있다는 건 역설적이겠지만, 그리고 어린 나이에 익혔던 글은 그림에 더 가깝게 인식되었을 테지만, 사람은 이야기적 존재라는 걸 생각하면 어색할 것도 없다.
이야기라고 하면 인물과 사건과 배경이 있어야 한다. 우리는 태어나서부터 모든 상황을 이야기로 인지한다. 따라서 자신과 타인을 분리할 수 있게 된 이후로는 이야기로 타인을 생각하고 이해할 수 있다. 그리고 타인의 이야기를 빌려 자신을 이해하기도 하고 자신이 썼던 글을 읽으면 (부끄럽지만) 자신을 이해할 수 있다. 내게 읽기는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기술 중 하나이기도 하지만 삶의 형태를 이해하고 확장할 수 있는 시간이기도 하다. 더듬더듬 한 글자씩 읽기 시작했던 그 때와 지금의 읽기를 비교하면 지금이 훨씬 숙련되기는 했지만 읽기의 의미와 목적은 크게 달라지지 않은 듯하다. 지적 욕망, 습관, 강박, 필요, 도피, 무엇이 동기가 되든지 읽기는 계속해서 반사작용처럼 일어날 것이다.
더 이상 눈으로 읽게 될 수 없을 때가, 혹은 읽을 수는 있지만 무슨 말인지 알 수 없을 때가 오는 걸 상상하면 무섭기도 하다. 뿌리부터 가지까지 뻗은 물줄기를 다른 방법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을지 확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그 방법을 찾는 여정에는 역시나 읽기가 있을 것이다.
- 박어깨 작가님의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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