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6년 반의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참 다양한 일을 했던 것 같습니다. 그중 가장 다이내믹했던 일이 있었습니다.
과장님: ㅇㅇ주무관, 우리 영상 만들고 있는 거, 그거 시사회 형식으로 행사 한 번 해야 해
나: 네?
과장님: 그 우리 지방에서 하는 행사랑 엮어서 시사회 하면 돼.
나: 아.. 넵
파트너 사무관도 없는 2년 차 공무원이 과장님의 말에 토를 달기 힘들었습니다. 그리고 원래 담당하던 업무가 아니라 갑자기 떠맡게 된 일이라 뭐라 말할 논리도 없었습니다.
먼저, 일정과 장소, 행사 규모, 대관 가능 여부, 예산 등등 여러 가지 여건들을 살펴봤습니다. 1달 정도 남은 기간 동안, 지방에서, 평일 오후 3시에, 약 300명 정도를 모객해서, 대중적으로 관심도가 전혀없는 영상 시사회를 기획해야 했습니다. 심지어, 미리 잡혀있던 예산도 없어서 자투리 예산을 긁어모아야 했습니다.
평달 실수령 200만 원도 못 받던 시절에 이걸 혼자 해내는 게 맞나 싶었습니다. 그래도 노비 근성이 충만해 있던 저의 몸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먼저, 대행 업체에 행사 견적을 받아보았습니다. 예산이 부족하다는 것을 어필했지만, 최소 1,000만 원은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가능한 예산은 600만 원 남짓이었습니다. 보고를 드렸더니, 무슨 그렇게 많이 드냐며, 다시 알아보고 줄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업체를 불러서, 항목 하나하나를 같이 보며 줄일 수 있는 부분을 봤지만, 녹록지 않았습니다. 사회자와 안내와 안전 인력 인건비만 해도, 아무리 줄이더라도 최소 400만 원 이상은 필요했습니다. 또, 일반적인 영상 재생이 아니라 영상 재생을 위한 전문적인 인력과 장비가 필요했습니다.
최대한 예산에 맞추기 위해 행사 기획과 운영 항목을 제외했습니다. 행사 기획과 현장 컨트롤을 직접 할 테니 빼달라고 한 후, 그냥 인건비 지급과 현수막 제작 정도만 업체에서 맡아달라고 했습니다. 그렇게 협상을 완료했습니다.
돈이 없어서 행사포스터 디자인과 번역 등을 내부에서 직접 했어야 했습니다. 평소 일면식도 없었던 공무직 분들께 불쌍한 척하면서 계속 부탁을 드렸습니다. 몸이 힘든 건 그래도 괜찮았는데, 눈치가 보여서 정말 힘들었습니다.
제일 문제가 되는 부분은 홍보였습니다. 어느 누가 평일 오후 3시에, 지방에서, 관심도 없는 영상 시사회를 올까요? 단순히 포스터를 붙이고 인터넷으로 공고하는 것만으로는 불가능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기관을 통해서 단체 관객을 모객해야 했습니다.
무작정 그 지방에 있는 관련 단체들을 찾아보고 연락을 돌렸습니다. 한 20개 넘는 기관에 전화를 돌린 것 같습니다. 그래도 한 곳에서 긍정적으로 말씀을 주셔서 출장을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을 통해서 소개받은 지역에 있는 학교에도 여러 군데 방문해서 행사에 대해서 말씀드리고 학생들이 와서 볼 수 있도록 담당자께 검토를 부탁드렸습니다.
출장을 간 김에 학교에 허가를 받고 직접 돌아다니면서 게시판에 포스터를 붙이고, 자정이 되어서야 집으로 돌아오게 되었습니다. 이때 즈음해서, 파트너 사무관님이 발령받아서 오셨는데, 같이 포스터 붙이면서 참 이렇게 일하는 게 맞냐며 서로 한탄을 했습니다.
이 당시 저는 양옆에 앉아 계시던 주무관님 두 분이 갑자기 휴직을 하셔서 3인분의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심지어 예산 시즌이라, 바쁜 시기였습니다. 맡고 있던 신규 사업 예산이 기관 내에서 중요한 이슈가 되어서, 할 일이 정말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행사 기획을 직접 해야 했습니다. 자리 배치부터 사회자 대본, 전반적인 행사 운영 내용 정리, 관련 기관 콘택트, 보고자료 제작까지 혼자 맡아서 하느라 정신이 없었습니다.
이 외에도 하고 있는 일이 너무 많았고, 대행하고 있는 업무와 예산 국회 이슈 대응, 행사 준비 때문에 거의 매일 출장을 갔다가 야근을 했습니다. 주말에도 국회 때문에 불려 나갔습니다.
내가 언제 뭘 했는지, 하루 전에 했던 일이 기억이 안 날 정도였습니다. 몸은 몸대로, 출장 중에 기차에서 불편한 자세로 일하는데 허리와 목이 정말 아팠습니다.
더 심각했던 점은, 이 행사 몇주 전, 행사를 열자고 하셨던 과장님께서 큰 사고로 입원을 하시게 되어 보고하고 컨펌을 받을 대상이 사라졌습니다. 사무관님은 과장님 일을 대신해야 해서 저보다도 정신없어 보였습니다.
그래도 어떻게든 시간을 흘러갔습니다. 하지만, 행사 1주일 전까지도 300명이 올 수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런데 딱 5일 전쯤부터, 협조를 요청했던 학교에서 하나둘씩 연락이 왔습니다.
'100명 보러 갈 수 있을 것 같아요'
'50명 가능합니다!'
'120명 데리고 갈게요'
정말 다행이었습니다. 내빈 등 확정된 참석자를 고려하면, 오히려 자리가 부족할 것 같아 그게 더 걱정이 될 정도였습니다. 포스터를 보고 오는 사람들은 몇 명 들어올 수도 없을 것 같았습니다. 어쨌든 모든 문제가 해결되었고 행사 준비를 마무리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행사 하루 전 날 아침
사무관님이 보고를 갔다 오시더니, 사색이 된 표정으로 말씀하셨습니다.
"행사 취소하래.."
머리가 띵했습니다. 실없이 웃으면서 장난하시는 거 아니냐고 묻기도 하고, 정말이냐며 사무관님께 3번 여쭤봤습니다. 분위기상 분명히 취소하는 게 기정사실화되었는데, 거의 1시간 동안 취소해야 한다는 그 말을 믿을 수가 없었습니다. 컴퓨터 앞에 앉아서 약간 눈물이 글썽여졌습니다.
결국 자포자기하고, 단체 관객을 데리고 오기로 한 기관 담당자에게 전화를 드려서 정말 죄송하다며 양해를 구했습니다.
문제는 학교에 붙여 놓았던 포스터를 보고 올 분들이 헛걸음을 할 것 같아 정말 걱정되었습니다. 그래서 행사 당일에 만들어놓았던 기념품을 한 박스 들고 가서 서있었습니다. 그래도 몇 분은 오시지 않을까 했는데 딱 한 분이 양복을 입고 오셨습니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씀드리고 기념품을 2개 쥐어드렸습니다. 참 여러모로 허무한 기분이었습니다.
왜 취소되었는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힘들지만, 그럴만한 이유가 있어서 나중에서야 이해가 조금은 되긴 했습니다. 윗선에서의 의사결정과 소통 문제 때문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실무자가 이렇게 개고생했을지 알기는 할까요?
공무원의 일이 참 그렇습니다. 주어진 재료는 적고, 결과물은 거대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의사결정은 갑작스레 이뤄지고, 또 갑작스레 달라집니다.
제일 심각한 건 인사와 업무 분배 같습니다. 신규 공무원에게 3인분의 일이 주어지고, 사무관, 과장 등 의지해야 할 자리가 공석인데도, 인력이 없어서 채워지지 않습니다. 바쁜 일이 있으면 기관 차원에서 유연하게 대응할 수도 있을 텐데, 다들 나 몰라라 합니다. '저긴 안 바쁘냐, 다 바쁘다'라고 하면서 말이죠...
이런 사례가 특이한 사례가 아니라 공무원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하다는 점이 참 안타깝습니다. 제 주변 동기들만 하더라도 눈물겨운 사연이 정말 많았습니다. 이런 조직 문화는 언제쯤 개선될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