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요와 불필요
입직 2년 차에 들어서, 신입 때부터 쭉 같이 근무해 왔던 파트너 사무관님이 정년퇴직을 하게 되었습니다. 후임자가 계속 발령 나지 않아서, 같은 과에 계셨던 다른 사무관님과 당분간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나이가 좀 있으셨고, 워낙 조용하신 분이셔서 대화를 많이 해보지는 못했었습니다. 일은 하나도 안 하시는 분이셨지만, 적어도 제가 하는 일에 태클을 걸거나 쓸데없는 일을 시키시지는 않으시는 분이라, 같이 일하기는 편하겠다 싶었습니다.
생각했던 대로였습니다. 그냥 일상적인 관계에서도 서로 나쁘지 않았고, 일하기도 편했습니다. 그리고 최근에 해외 파견도 다녀왔던 분이셔서,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역시 평화는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종교생활을 엄청 열심히 하시는 분인 것은 알고 있었고, 예전에 주변 동료들에게 포교를 많이 하셨다는 소문도 알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같이 사무실을 쓰는 동안에는 그런 행동을 전혀 하지 않으셨어서, 크게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였을까요? 말씀이 매우 없으셨던 분인데, 어느 순간부터 저에게 말을 많이 거시고, 너무나도 친절하게 대해 주시더라고요. 처음에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그래도 나쁘게 생각하지는 않아서 같이 산책도 하고 따로 이야기도 자주 했습니다.
어느 날, 퇴근 무렵 제 자리 뒤에서 우물쭈물하시는 게 느껴졌습니다. 갑자기 리플릿 하나를 쓱 밀어 넣고 아무 말 없이 가셨습니다. '뭐지?' 하고 돌아봤는데, 쌩하고 가시더라고요. 리플릿을 보니, 종교 수련 캠프 관련 내용이었습니다. 같은 사무실에 계신 분께 리플릿 받으셨냐고 여쭤봤는데, 저만 주고 가셨더라고요. 느낌이 좀 이상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음 날, 일을 하고 있는데 사무관님이 잠깐 보자고 하셔서 나갔습니다.
사무관: ㅇㅇ씨 고향이 어디랬지?
나: ㅇㅇ입니다
사무관: 아 맞다 그랬지. 근데 어제 리플릿 읽어 봤어?
나: 아.. 네..
사무관: 시간 되면 한 번 가지? 좋은 행사야
나: 아.. 저는 종교에 관심이 좀 없어서요..ㅎㅎ
사무관: 아 그래? 그래도 한 번 생각해 봐.. 꼭 왔으면 좋겠네
나: 아.. 네..ㅎㅎ
사무관: 너무 부담 갖지 말고 와봐
나: ^_^
예상대로였습니다. 고향은 대체 몇 번째 물어보는지... 그 후로도 계속 저를 따로 불러내었습니다.
항상 똑같은 레퍼토리였습니다. 일상 이야기를 시작하는가 싶더니 1분 만에 종교 이야기로 빠졌습니다. 너무 스트레스받았지만, 나이도 많고, 같이 일하는 사무관님이라 뭐라 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냥 적당히 이야기 들어주다가 일해야 한다며 피했습니다. 거의 2주 동안 시달린 것 같습니다.
하루는 눈이 정말 많이 왔습니다. 그날 어쩌다 보니 점심을 구내식당에서 사무관님과 단둘이 먹게 되었습니다.
최대한 빨리 밥을 먹고 혼자 쉬려고 재빠르게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또 말을 걸어올 것 같아서, 속이 부대끼는데도 자리에 엎드려서 자는 척했습니다.
그런데 사무관님이 굳이 와서 산책을 가자며 저를 깨웠습니다. 하는 수 없이 일어나서 일단 나갔습니다. 눈이 많이 오는데 또 굳이 굳이, 밖에서 걷자고 하시더라고요.
밖으로 나가니 눈이 수북이 쌓여서 걷기도 힘들고, 우산을 쓰면서 산책해야 했습니다. 다시 돌아가는 게 낫지 않겠냐고 말씀드렸더니, 중얼대시면서 그냥 잠깐만 걷고 들어가자고 하셨습니다.
어쩔 수 없이 신발과 바지까지 젖어가며 눈길을 걸었습니다.
사무관: ㅇㅇ씨 고향이 어디랬지?
나: ㅇㅇ예요...(몇 번째 물어보는 거지...)
사무관: 아 그랬었지.. 공무원 생활은 할만해?
나: 아 네 뭐 아직까지는 괜찮습니다.
사무관: 근데 그 캠프는 생각해 봤어?
나: 그거는 계속 말씀드렸지만 가기 힘들 것 같습니다.
사무관: 그냥 한 번 가보는 건데 왜 그래
나: 저랑은 좀 안 맞아서요..
그런데 갑자기
사무관: 하나님은 공기와 같은 거야.. 어디에나 존재해. 숨을 한 번 쉬면서 느껴봐
나:...
사무관: 그리고 이렇게 말해봐 '오.. 나의 하나님..'
나: ...
사무관: 그냥 한 번만 해봐... '오.. 나의 하나님..'
정말 그 순간 속에서 토가 올라오는 게 느껴졌습니다. 몇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 대화가 소름 돋게 생생합니다. 도저히 참을 수가 없어서 더 이상 대꾸하지 않고, 혼자 뒤돌아서 빠른 걸음으로 돌아왔습니다. 뒤에서 부르시는데 그냥 무시하고 사무실로 내려와 앉았습니다.
특정 종교를 비난하는 건 절대 아닙니다. 그저 위계를 활용해서 이렇게 지속적으로 강요하는 게 정말 개인적으로 너무 힘들었습니다.
그 뒤로도 사무관님이 몇 번 불렀지만 나가지 않았고, 바쁘다고 무시했습니다. 그러고 나니, 더 이상 말을 걸지 않으시더군요.
몇 달 후, 사무관님은 정년이 꽤 남으셨는데도 불구하고, 건강 상의 이유로 명예퇴직을 하셨습니다.
나중에 들어보니, 회사에서 스트레스가 좀 심하셨다고 하더라고요. 사무실 내에서 같이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도 없었고, 특히, 일을 하지 않으니 아래위로 치이셨나 봅니다. 좀 마음이 안 좋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탓할 수 있는 건 본인 자신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입사 후, 연속 두 번째였습니다. 신입인 제가, 보고 배울 수 있는 사수를 입사 후 만 2년 동안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스트레스만 받고, 역으로 케어를 해야 하는 사람만 만난 겁니다. 심지어 원래 파트너 사무관 자리의 공석은 몇 달째 계속되었습니다.
다른 대규모 조직도 마찬가지겠지만, 공무원 조직에서는 조직 내에서 '필요한 사람'과 '필요하지 않은 사람'으로 극명하게 갈립니다. 범법행위만 하지 않으면 절대 잘릴 일이 없기 때문에,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상대적으로 중요도가 떨어지는 기관이나 과에 중점적으로 배정됩니다.
결국, 중요도가 떨어지는 기관에는, 조직 내에서 경험적으로 판명된 '불필요한 사람'과, 신입으로 들어와서 아직 '불필요한 사람'들이 모이게 됩니다. 전자는 더 이상 일을 할 동기가 없고, 후자는 업무를 배울 수 없을뿐더러, 전자의 업무와 사적인 압박(술자리, 제 경우엔 종교)까지 감당해야 합니다.
조직의 생리상 어쩔 수 없긴 한 것 같습니다. 중요한 조직에는 힘 있는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꼭 인사파트에 '필요한 사람'을 요청합니다. 힘 있는 사람의 요청이기도 하고 중요한 자리이기 때문에 거절하기도 힘듭니다. 하지만 저연차 공무원의 대탈출이 일어나고 있는 상황에서, 이런 부분도 인사 측면에서 고려를 해야 할 필요가 있는 문제가 아닌가 생각합니다.